복음: 마르코 12,1-12
<짐승만도 못하지 않기 위해>
사우디 데일리 저널 Sada에 한 들개가 소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굶주린 한 마리의 들개가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여 그것을 물고 걷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요?
개가 물고 있던 것은 인간의 아기였습니다.
탯줄이 붙은 채 버려진 아기였던 것입니다(유튜브엔 사진도 있음).
배고픈 들개가 한 행동은 아기를 물고 가까운 민가로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기를 놓고 놀라서 모여든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황급히 아기를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아기는 건강한 몸 상태로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에 아무런 외상도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기 어머니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모성 넘치는 착한 개의 사연은 미디어로 전 세계로 퍼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들개도 암컷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똥개가 쓰레기 두는 곳 중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감동 TV, 유튜브]
사람이 개만도 못할 때는 언제일까요?
사람과 짐승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아기를 낳아 버린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는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개만도 못할까요?
바로 ‘사랑의 본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성애는 본성입니다.
개는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은 잃었던 것입니다.
진화는 이 사랑의 정도에 의해 측정됩니다.
대장균이나 기생충, 모기와 같은 것들은 남의 피만 빨아먹을 뿐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장류가 되면 자식들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새끼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이 되고 또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원수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원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원수인 인간들을 위해 아드님을 내어주신 것은 하느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지를 설명합니다.
구원은 사랑의 본성을 얼마만큼 입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자신 안의 사랑의 정도가 얼마나 구원에 가까운지와 비례합니다.
동물의 본성에서 하느님의 본성에로 이동하기 위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첫째 단계는, 먼저 “하느님을 아는 지식”입니다(2베드 1,3 참조). 아기가 태어나 부모님을 만나고 부모님을 먼저 알지 못하면 부모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가난한 고아가 큰 부자의 상속자임이 밝혀진다면 매우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녀이고 상속자임을 알아도 사람들은 크게 기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단계는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2베드 1,3 참조).
은총은 성령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은 기도를 통해 오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말씀의 전례에, 은총을 받는 시간은 성찬의 전례와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께서 받으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흘려주셨는데, 그 살과 피가 은총이고 성령이십니다.
성체 앞에 앉아만 있어도 이 은총은 마치 기압차에 의해 바람이 발생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흘러들어 오십니다.
셋째 단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옛 동물의 이기적 욕망을 버리게 하고 사랑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듭니다(2베드 1,4 참조).
왜 동물의 욕망에서 벗어나는데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될까요?
사실 욕망과 본성은 같은 말입니다.
피를 빨아먹기 좋아하는 욕망을 지녔다면 본성상 그것은 모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바다에 피가 떨어졌는데 4km 밖에서도 그 피의 냄새를 맡으면 그것은 상어일 가능성이 큽니다.
동물의 썩는 냄새를 잘 맡는다면 그것은 하이에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듯 본성과 욕망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동물의 욕구, 즉 동물의 본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사랑의 본성에 참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성을 입으려면 동물의 본성은 버려야만 합니다.
뱀과 사람이 한 방에서 잘 수 없는 것과 같이 동물의 욕망이 죽지 않으면 하느님의 본성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넷째 단계로 알아야 할 것은 이 본성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성은 우리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조금씩 변해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의 본성으로의 변화를 열성적으로 원해야하고, 사랑의 습관을 들여 그것이 내 안에서 덕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덕에 지식을 더하고 인내와 절제를 통해 끊임없이 옛 본성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2베드 1,5-7 참조).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짧은 편지 안에 구원의 원리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열성’입니다.
열성은 강렬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열성이 있다면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기도를 통한 은총생활로 하루하루 좋은 습관을 들여 나갈 수 있습니다.
습관이 덕이 되면 본성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조금의 시간을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쌓는데 시간을 내고 있는지, 규칙적으로 십자가 밑에 머물려고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지식과 은총은 결국 열성에서 옵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 공부도 하지 않고 은총을 받기 위해 성체 앞에 앉을 시간도 없다면 사실은 동물의 본성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마지막에 가서도 그 본성이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남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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