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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5-21 조회수 : 517

마태오 28,16-20 
 
승천하는 삶만이 사랑인 이유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 부활과 승천은 그 사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서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승천하는 삶이 아니면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하고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 자녀가 되어 이웃들도 가르침과 세례로
그렇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사제란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CCC, 1589)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할 때 알게 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진리’입니다. 
 
어떤 자녀도 이 은총과 진리를 통해 태어나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며 그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그 부모가 알려주는 진리를 닮게 됩니다.
율법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사랑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쨌건 사제직은 중간에서 남편에게 받아 자녀의 지위를 높여주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그해에는 워낙 농사가 잘되어 먹음직스러운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자기 사과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임금님을 만나려는 농부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나름대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왔습니다.
그러나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던 것입니다. 
 
농부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던 왕비가 이것을 목격합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자초지종을 듣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금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님 옆에서 직접 깎아 드렸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러운 왕비가 깎아 주는 사과를 맛보고 매우 흡족해하였습니다.  
 
왕비는 그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가난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여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왕비’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자기 것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도 사랑해서 평생 가진 것을 다 팔아가며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이 결혼하여 어머니를 모시는데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 잘해 주기 위해 아들에게 잘못 하는 것 같은 며느리를 못살게 굽니다.
며느리는 자살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더는 안 보겠다며 떠나갑니다.
어머니는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서운해합니다. 
 
어머니는 과연 사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어쩔 수 없이 모기입니다.
내가 무언가 내어준다 생각해도 그것을 통해 나의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할 뿐입니다.
이는 상대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부담스럽게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받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제직만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하는 삶’입니다.  
 
교리서는 “십자가가 승천의 시작”(662)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인 것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다가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신 안에 잉태하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모님을 통해 성령이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에게 가득 찹니다.
성령을 중개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곧 은총과 진리를 받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향하는 승천하는 삶만이 사랑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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