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31-42
요한 6,60ㄴ-69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깊은 우물 속의 차가운 물처럼 시원한 말씀이 될수도 있습니다.
마치 번개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정수리부터 발끝을 통과하며 우리를 전율케하고, 깨우치게 하며 새 삶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은 ‘듣기 너무 거북한 말씀’, ‘걸림돌이 되는 말씀’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의혹하고 불신하며, 결국 꼬투리 잡고, 그 결과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놀랍게도 한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과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던 사명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할 게 아닙니다.
떠나감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반복됩니다.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살게 됩니다.
본능에만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별 의미 없는 말씀, 구름잡는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논리로만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알쏭달쏭한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화두로 붙들고, 묵상하고 또 묵상할 때, 조금씩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말씀, 생명수보다 더 값진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위를 생각하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데, 떠나간 제자들은 한사코 아래만 내려다봤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래의 세상만이 전부인양 뚫어지게 아래만 바라봤습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물론 아래, 이 세상, 때로 구차스럽게 보이는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 하늘과 땅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아래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삶 속에 영적인 측면은 초라할 정도로 위축되고,
그저 육에 따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비참이요, 죽음일 것입니다.
한 명 한 명 떠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앞에 마음이 몹시 슬퍼지셨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복음 6장 67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6장 68~69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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