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22-29
기적과 표징의 차이는 행위와 존재의 차이다
“선생님 제가 물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을 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 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이 제자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능력이 어떤 일을 행하거나 행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물 위를 걷는다고 해서 어떠한 칭찬도 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셨던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氣)를 수련하는 이들은 진짜 공중부양을 한다고 합니다.
절벽에서 1미터 가량 떠서 설법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국 스님은 하버드 대학에서 30센티 공중부양을 보여주고 그것을 보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을 매혹시킨 적도 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특이한 현상을 이루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큰 기적을 보이면 그 사람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는 기적의 종교가 아니라 표징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찾아온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행위나 이적에 집중하는 이들은 육체적인 이들이고,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이란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 우리에게 달라고 하는 ‘양식’, 곧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적은 표징입니다.
그리스도도 기적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표징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아들’이고 표징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기적만 보고 어떤 이들은 표징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차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아들이 하시는 일은 표징인 것입니다.
기적을 보는 이들은 육체와 그 감정만을 추구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모두 그분을 버리고 떠나가고 맙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되어지는 믿음은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표징이 된 이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먹였던 만나가 곧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것과 같고 또 그렇게 그런 기적은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이 되어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표징을 읽어낸 사람의 삶은 온통 변화되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아니 무엇이 되어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기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이들의 특성을 이야기하십니다.
기적을 본 이들은 무언가 ‘해서’ 그 기적에 응답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봉사활동을 한다든가, 죄의 행위를 끊어버리는 등의 일을 해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묻는 질문은 항상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런 이들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는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을 바리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를 인정하십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아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오로 사도처럼 고생한 분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성모님이 바오로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아주 많은 일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일 자체가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는 존재가 변화되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이어야지 억지로 마음에 드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안 됩니다.
행복한 만큼만 행하십시오.
이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고 자신을 아는 길입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 되었기에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따뜻한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주위의 우리들이 그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은 우리를 살리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음과 향기를 주는 꽃들도 마찬가지고,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좋은 일을 행했던 이들이 자신들이 한 행위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행위로 당신께 봉사하며 예수님의 발치에서만 있으려는 자신의 동생을 판단하는
언니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발치에 붙어있는 것. 그것만 바라십니다.
그것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만 한다면 ‘저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봉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매일 말씀이나 성경을 읽을 시간도 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이 원하는 것은 일 잘 하는 가정부가 아닌 순결한 신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