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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4-22 조회수 : 500

요한 6,16-21 

성체를 영하는 마음과 잠을 청하는 마음은 같다 

 

 

저는 성체를 영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을 먹이시고 이어 오늘 복음처럼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같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40년을 버틸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은 마치 풍랑 가운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처럼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남도 처음엔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걱정, 근심, 두려움, 염려를

당신만 받아들이면 사라지게 하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을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는 곳에 가 닿았다고 말합니다.

더는 큰 바람이 일으키는 큰 물결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과 근심은 내가 죽어야만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해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는 그렇게 내가 죽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저는 성체를 영하는 이 순간이 ‘잠’을 자기 전의 기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잠은 상당한 모험입니다.

잠은 죽음과 가장 가깝습니다. 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을 청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잠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날 상쾌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힘 있게 하루를 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잠에 관한 두 개의 영화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슬리핑 뷰티(Sleeping Beauty)’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루시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입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월세도 못 낼 정도입니다.

그런데 고액 알바가 들어옵니다.

그냥 수면제를 먹고 한숨 자고 나오면 됩니다.

신체의 어떤 손상도 입지 않습니다.

그녀는 점점 부유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알바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자신이 잠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알고 봤더니 돈은 많지만 잠이 오지 않는 노인들이 자신 옆에서 잠을 청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노인들은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다윗도 젊은 여인을 옆에 두고 잠을 청했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떤 노인들은 그녀 옆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잠이 곧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모험을 하려면 자신을 언제나 받아줄 것만 같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노인들은 잠자는 젊은 여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영화는 ‘세븐 파운즈(Seven Pounds)’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7명의 가족과 애인을 잃게 됩니다.

잠도 안 오고 두려워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사람이 일곱이니

자신도 일곱 명에게 새 생명을 주기로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심장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심장을 내어주며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잠이 들기 전에 내 죽음을 책임져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위 영화에서는 자신을 받아줄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잠 자기 두려운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물에 빠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죄책감’ 없이 죽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세븐 파운즈에서는 일곱 명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며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성체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가 다니라 그분이 의로우셔서 우리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과 죄책감을 성체로 해결하면 우리는 편하게 잘 수 있고 편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진정한 목적지입니다.

결국 우리 모든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편하게 잠들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안에 성체로 들어오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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