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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4-19 조회수 : 490

요한 3,16-21 

내가 빛인지 어둠인지 아는 방법 

 

 

요한복음 3장은 구원의 원리 전반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기적과 표징은 그저 예수님께로 이끄는 방향 판과 같았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통해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있는데 그분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죽이고 그분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제까지 내용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죄의 결과로 아드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결국 지옥에 갈 운명이었지만, 그중에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행실이 좋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나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미 “진리를 실천하는 이가 빛으로 나아가지” 그렇지 않은 자는 지금은 예수님께로

오는 것 같을지라도 결국엔 빛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은 이미 착하게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빛은 이렇게 어떤 사람의 행실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좋은 행실을 하는 사람은 그 행실이 더 드러나게 만들기 위해 빛으로 나아오고 어둠의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더 멀리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인지 어둠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그대로 나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내 이름은 칸’(My Name Is Khan, 2010)은 인도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앓는 인도 무슬림 남성이 미국에서 테러와 편견에 맞서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칸은 남자아이가 있는 이혼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내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심화되고 이슬람

혐오가 높아집니다. 이에 따라 칸과 그의 가족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아들이 새 아빠 때문에 이슬람 성을 쓰게 되어 학교에서 인종 차별적인 놀림을 겪고 결국 참혹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내는 아들이 죽은 것이 무슬림인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아이들을 찾아내려 하지만 목격 증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한 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아이도 아이들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내는 칸을 떠나버리라고 내칩니다.

칸은 어떻게 하면 돌아올 수 있느냐고 하고 어이가 없는 아내는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아들이 테러리스트의 아들로 죽은 게 아니게 되니까.  

 

칸은 이내 짐을 싸서 대통령을 만나러 갑니다.

당연히 가는 길도 험난했고 가서도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해받아 심한 고문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무슬림이기는 했지만, 무슬림 테러단체를 신고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언론이 그를 주목합니다. 

 

그는 유명 인사가 되고 드디어 아내가 보는 앞에서 대통령을 만나 아내가 원했던 말을 합니다.

이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친구들이 칸의 아들을

폭행해 죽였다고 경찰에 실토하게 됩니다.  

 

빛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빛 안엔 거짓이 없습니다.

그 거짓 없음은 주저하는 이를 거짓이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짓이 있는 이들을 더 숨게 만듭니다.

착한 사람은 더 착하게 만들고 악한 사람은 더 악하게 합니다.

이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왜 빛이 심판관이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가 빛이 되려면 예수님 이전에 예수님처럼 착하기를 원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의 선함에 내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 나아가야만 더 착해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분께 나아갑니다.

그러면 나도 빛이 됩니다.  

 

착해진다는 말은 거짓말과 자아, 그로부터 발생하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를 살리고 이웃을 죽이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육.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고 친해진다면 나는 빛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멀리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다가온다면 나는 빛입니다.  

 

이것이 내가 빛인지 어둠인지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나에게 모이는 사람이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 욕망을 따르고 이웃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어둠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들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빛입니다.

이렇게 빛을 통한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의 구원을 통해 이웃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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