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3,7ㄱ.8-15
비유를 이해함이 왜 심판의 기준이 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새로 남’에 대해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뱀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그 뱀을 예수님 자신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구리뱀을 보면 치유되었습니다.
이는 누구나 다 자기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뱀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다면 구원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혀서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 같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한탄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세상일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곧 하늘 일의 비유를 말합니다.
비유는 쉽게 이해하라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서 자신들, 곧 선택된 이들만을 구원하시려고 한다는 사이비들의 말은 하느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영혼도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니 쉬워지라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쉬운 비유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천상 구원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 한 연세 지긋하신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학벌도 좋으시고 세상에서도 승승장구하시던 분이십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너무나 집에 악재가 겹쳐서 커다란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한 친구가 종교를 가져보라고 권유하였고 이분은 목사님 친구분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올 1월부터 통신교리로 세례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분의 친구분 중의 한 분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저에게 상담해보라고
추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우 영광스러웠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친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찾아오신 분의 질문은 왜, 혹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는 이미 친구분을 통해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 어머니가 너의 친어머니인 것이 확실하냐? DNA 검사를 해서 믿느냐? 안 믿으면 안 되니까,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보고 믿지 않느냐? 하느님도 어머니처럼 가진 것을 다 내어주시며 당신이 부모라고 하신다.
어머니를 믿지 않는 것이 지옥이듯, 하느님을 믿는 것도 선택이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는 게 당연하듯, 우리가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사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뭐 누가 봐도 그 친구분은 저의 글이나 동영상을 보신 분이십니다.
제가 어머니를 믿어가던 과정을 분명 들으신 것입니다.
친구분의 이 말씀으로 저를 찾아오신 분도 하느님을 창조주로 이미 믿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실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엔 왜 믿지 못하셨을까요? 아직 자기 생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 지상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해하기 쉽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비유를 이해하지 못함이 곧 심판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이 지상의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겸손해져야 합니다.
아무리 쉬운 비유를 말하더라도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 생각에 쌓여있으면 그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므로 쉬운 비유조차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구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역사로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로마 비블리꿈 조교수가 성경은 있는 그대로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게 상징적인 눈으로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집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구 죽이셨는데 그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시고 이집트 백성은 미워하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도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 자기주장이 꺾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를 인정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의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고 하시며 어떻게 우리가 하늘에 오를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어떤 누구도 하늘에서 새로 나지 않으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의 시를 쓰신 심순덕 시인처럼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신도 결혼해서 어머니가 되어보니 그런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머니의 피 흘림을 통해 또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피를 흘립니다. 장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여 묻힘은 곧 부활로, 자녀들의 공경으로 들어 높여집니다.
하늘에서 와서 자신을 새 생명을 주기 위해 못 박아 죽이지 않으면 다시 들어 높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신비는 우리 일상에 숨어있습니다. 하지만 땅의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니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받아들이려고 하는
‘겸손함’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결국 그분은 나의 교만,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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