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6,9-15
작은 죽음의 체험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는 반드시 선행 조건이 하나 따라붙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에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기꺼이 수용하고 넘어선 이후에라야,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앞에 보인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에 비해 그분 부활의 최초 목격자이자 부활의
증인이 된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부활 앞에 사도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드시 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둘도 아니고 일곱입니다.
이 말은 완전 마귀 들렸다는 것, 구제 불능, 치유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 마귀들의 횡포로 인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생전 일종의 작은 죽음 체험을 많이 한 것입니다.
혹독한 병고로 인한 작은 죽음 체험, 무시무시한 마귀의 횡포로 인한 작은 죽음 체험,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홀대로 인한 작은 죽음 체험...그녀는 매일 죽음과 맞닿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역설적이게도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평범한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깊이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따뜻하고 자상한 예수님 자비의 손길로 일곱 마귀로부터 해방된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죽음이 어떤 것인지?
반대로 참삶이 어떤 것인지?
부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신비와 베일로 가득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열두 사도를 비롯한 다른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고, 선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네 일상 안에서 거듭 반복되는 작은 죽음의 체험을 보다 호의적이고
낙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작은 죽음들을 기쁘게 수용하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유형의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뜻하지 않은 병고에 시달리는 것, 하루하루 노화되어가는 것,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 참담한 실패,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받는 배척과 상처와 굴욕...
이 모든 역경들, 작은 죽음의 체험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열쇠요 도우미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고, 하루하루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비결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잦는, 그리고 성숙한 죽음 연습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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