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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4-11 조회수 : 547

요한 20,11-18 

예수님께서 사랑하려는 이에게만 나타나시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도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타락의 소굴에서 건져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다 보면 믿어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사랑을 떠받치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원하고 믿는 일은 사랑을 높이기 위한 목적입니다.

물론 믿어지면 더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하려는 자에게 믿음을 가장 먼저 주십니다.  

 

영화 ‘라이언’은 어린 시절, 기차에서 잠들어버린 다섯 살 인도 소년 꼬마 라이언이 호주에 입양되었다가 다시 어머니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다섯 살 꼬마 라이언은 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석탄을 훔쳐 엄마에게 우유를 사다 드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형이 나갈 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졸랐지만, 잠이 너무 쏟아져 형은 동생을 업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잠깐 자라고 하고 절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라이언은 잠을 자다 일어났고 형을 찾아 어떤 기차에 올랐는데 거기서 또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며칠을 그렇게 간 끝에 더는 집을 찾을 수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아원에 있다가 그는 사랑이 많은 한 호주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의 양부모는 다른 형도 한 명 입양하였는데 그 형은 좀 망나니였습니다.

엄마도 사랑스러웠지만, 엄마를 사랑할수록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친엄마가 자신을 잃고 슬퍼할 것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괜히 데려 나와 잃어버린 죄책감에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인과의 관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삶이 엉망이 됩니다.

25년이 지난 뒤 라이언은 엄마를 다시 찾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구글 지도가 인터넷에 올라왔고 그는 구글 지도를 통해 자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주위를 뒤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의 기억에 있는 동네와 똑같은 곳을 발견합니다.  

 

25년 만에 엄마를 만나 처음으로 한 말은 죄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다른 동네로 가지 않고 그 동네에서만 살았습니다.

불행히도 형은 25년 전 그날 동생을 찾다가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친어머니에게 소개해줍니다.

이제 진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워준 부모님이나 그 부모님이 입양한 망나니 형까지.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낳아주시고 존재하게 하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만나기를 필요로 합니까?

어쩌면 마리아 막달레나만큼 예수님을 만나기를 희망한 사람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유튜브에서 보면 새끼 때 자기를 구조한 사람을 엄마로 믿는 새나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물들은 어미를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조금만 사랑을 준 대상이라도 부모로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많은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창조자로 여기고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한 유일한 분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벌면 되지’, ‘성공하면 되지’, ‘자녀를 잘 키우면 되지’ 등으로 각자가 삶의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그 공허함 속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끝까지 창조자가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를 보여주신 유일한 분을 사랑하기를 거부합니다.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자신을 시궁창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채 그녀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찾으면 결국엔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그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형제도 존재하게 하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이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 뜻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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