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8,1-10
부활은 먹는 음식을 바꾸는 것
‘웜 바디스’란 영화가 있습니다.
‘따뜻한 몸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텐데, 좀비들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들은, 사람, 좀비, 보니(뼈다귀들), 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좀비는 비록 죽었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인간으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이고, 보니들은 인간이 되는 것을 아예 포기해버린 것들입니다.
한 여성이 좀비의 세계로 들어와 한 좀비를 사랑해서 그 좀비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후에 그 사랑이 더 많은 좀비들에게 퍼져가 결국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사는 뼈다귀들을 이긴다는 내용입니다.
성서의 내용 그대로를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영화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들어와 유다와 같이 완전히 포기해버린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영적인 심장을 뛰게 만들어 구원하신다는 내용과 같습니다.
부활은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단계로의 진화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살기 적합한 몸을 지니고 있다가
이제는 한 차원 다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육신으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변화를 위해 부족한 것을 누군가가 채워주는 것이 곧 부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단계를 넘어섰다는 증거는 먹던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비들은 배가 고파서 인간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고 나면 사람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당신이 부활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 보이기는 하시지만
이 세상의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그런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애벌레 때 먹던 쓴 잎사귀를 버리고 단 꿀을 먹으며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들이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릴 때 끼워주는 것이 ‘공갈젖꼭지’라고 합니다.
물론 공갈젖꼭지는 젖이 나오지 않지만 아기를 잠시나마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기 입이 튀어 나온다던가 입안이 허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 계속 물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의 공갈젖꼭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인생의 고통을 돈으로, 혹은 쾌락으로, 혹은 명예로, 혹은 성취로 채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공갈젖꼭지입니다.
즉 에너지가 솟아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갈이 끝나면 더 큰 공허함에 직면하게 됩니다.
공갈젖꼭지를 떼는 방법은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이 공갈젖꼭지 물고 다니지는 않지 않습니까?
어른은 젖보다 더 맛있는 음식들을 먹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물려줘봐야 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다면 어른은 아닌 것입니다.
아직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있다면 아직은 부활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떤 이들이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아직은 온전히 만나지 않았다고 판단해도 될 것입니다.
영화 ‘마라톤’은 자폐증을 가진 한 소년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초원이입니다.
초원이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무언가 가르쳐보고자 합니다.
초원이는 다리가 매우 튼튼합니다.
초원이가 엄마에게 “초원이 다리는?”하고 물으면 엄마는 곧바로 “백만 불짜리 다리!”라고 대답합니다.
엄마 소망은 초원이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이지만 코치는 그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마라톤은 페이스조절이 우선인데 초원이는 그것을 하지 못해서 심장에 무리가 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초원이가 힘들어 할 때는 그가 좋아하는 초코파이와 자장면으로 동기부여를 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초원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원이는 묻습니다.
“초원이 다리는?” “... 백만 불짜리 다리!”
초원이는 자장면과 탕수육보다 뛰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덥석 주저앉습니다. 한 사람이 힘내라고 초코파이를 주고 갑니다.
무언가를 생각한 초원이는 다시 일어나 뛰면서 받은 초코파이를 땅에 버립니다.
아마도 자신이 자장면과 탕수육을 포기하고 선택한 마라톤이었음을 초코파이를 보면서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선택했다면 그 포기한 것보다 더 큰 이득이 돌아와야 합니다.
이때부터 초원이는 마치 초원을 달리는 것처럼 마라톤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억지로 힘들게 완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뛰는 것을 즐깁니다.
물론 그는 2002년 국내 최연소로 장애인으로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라톤과 같을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그냥 주저앉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중간 중간 놓여있는 음료수와 초코파이를 위해서 뛰기도 합니다.
그러나 뛰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으면 언제는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가 말한 대로 초원이는 자신의 다리를 믿었고 그 다리로 뛰는 것을 즐겼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고 부활과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예수님과 함께 부활 한 것입니다.
어찌 이전의 삶과 같겠습니까?
삶 자체가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도 공갈젖꼭지로 자신을 속이며 하루하루 살아오던 데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먹으며 인생을 즐기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루하루를 부질없는 세상 것들을 얻으려는 공갈젖꼭지로 자신을 속여가며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 것들에 집착하고 세상 것들을 위해서 산다면 아직은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는 아기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며, 새로운 에너지로 살아가는 단계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어떤 성인은 몇 년 동안 성체와 물만 영하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는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맛있는 삶을 살라는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초원이가 초코파이를 버렸을 때 참으로 뛰는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을 때 참 삶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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