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6,14─27.66
우리는 진정으로 “호산나!”라고 외치는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울 때 ‘나를 위해 사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누군가를 찾게 됩니다.
그분이 구원자이시고 그분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만약 아직도 ‘나’로 살아가는 것이 견딜만하다면 어떻게 호산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영화 ‘마더’(2009)에서는 장애를 지니고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에게 농약이 든 박카스를 마시게 해서 아이가 그렇게 된 데 대한 매우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배운 침술로 돈을 벌고 아들을 위해 씁니다.
어머니는 감옥에 갇힌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 아들의 유일한 친구도 의심하고 여러 사람에게 좋지 못한 일을 행합니다.
마치 침을 꽂으면 아픈 것처럼 타인을 아프게 하는 모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아들이 살인을 저지른 범인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위해 산다는 핑계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때의 죄책감을 갚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방식입니다.
우리 안에 ‘뱀’이 한 마리씩 있습니다.
‘자아’(ego)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의 뱀이 하와를 자기를 위해 살게 만든
것처럼 자아는 자녀 사랑까지도 이기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둡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그 죄책감을 없애줄 분뿐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
그분만이 우리를 자아의 무덤에서 불러내실 수 있으십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새총으로 놀다가 할머니 오리 한 마리를 죽게 했습니다.
아이는 오리를 장작 깊숙한 곳에 숨겼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그 아이의 여동생보고 설거지를 함께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오빠가 할 것이라 말합니다.
오빠가 자신이 왜 해야 하느냐며 따집니다.
이때 동생은 오빠의 귀에 대고 “오리를 기억해!”라고 속삭입니다.
동생이 봤던 것입니다.
여동생은 며칠 동안 모든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는 말로 오빠에게 시킵니다.
오빠는 이제 자유롭지 못하고 여동생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합니다.
“지금 나를 구하소서. 호산나!” 할머니는 “나도 다 알고 있었어. 네가 언제까지 동생에게 노예 생활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여동생이 아닌 자신을 용서해 준 할머니를 위해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여동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죄를 없다고 하시려고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면 됩니다. 아버지를 위해 살면 됩니다.
하지만 오리를 죽인 값에 대한 피해는 할머니가 지는 것처럼, 우리 죄에 대한 피해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지십니다.
우리가 그 값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면 결국 죄를 용서받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녀들이 부모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야 얻게 됩니다.
한 부자가 죽을병이 들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들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손으로 한 달 동안 일해서 돈을 벌어오면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친구들에게 돈을 꾸어 한 달 뒤에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하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롯불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벌어오라고 합니다.
아들은 이번에도 빌린 돈을 가져다드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그것을 불에 던집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아들은 안 되겠다 싶어 정말 고생고생하며 돈을 법니다.
처음 일을 해 본 것이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난롯불에 던졌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이건 제 피와 같은 돈이에요!”라며 난로에 손을 집어넣고 불타고 있는 돈을 꺼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에 화상까지 입습니다.
이것을 보고서야 아버지는 “이제 유산을 물려주어도 되겠다!”라고 하며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은 그만큼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물려주시는 아버지를 위해 살기로 결심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 “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나 자신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우리를 해방하러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값을 묵상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고마운 사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한 감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나아감이 참다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성체의 모양으로 우리 안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께 겉옷을 벗어 깔 수 있는 감사의 마음으로 성취됩니다.
매일 미사가 진정한 구원의 예루살렘 입성이 되게 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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