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8,31-42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는 이유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 중 60명 정원인 배에 피란민 1만 4,000명을 구한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의 시복시성이 추진됩니다.
라루 선장은 전쟁을 겪은 뒤인 1954년 20년간 생활한 바다를 등지고 마리누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베네딕도회에 들어갑니다.
12월 23일 흥남 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수많은 기뢰가 있던 동해를 항해했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주님 성탄 대축일인 25일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렀습니다.
항해하는 이틀 동안 배 안에서 아기 5명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구조된 1만4000명의 후손은
현재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거제도에 왔었습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수도원에 들어갔을까요? 이웃 사랑을 포기한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새로 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나의 존재 이유입니다.
따라서 사춘기까지 육체적인 부모가 생존만을 강조했다면 사춘기가 된 아이는 이제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과 같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이 자기 삶의 방식과 맞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 사람들에게 추앙받기를 원할 때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그렇게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원의가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의 대로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 등이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는 창조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도 다 창조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을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를 따릅니다. 자연의 이치는 생존입니다.
하지만 나의 생존은 역시 정글의 법칙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법칙입니다.
생존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결국 인간이 믿는 아버지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나 아니면, 자연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였다면 하느님은 부모처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춘기가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게 되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적합하게 해 주는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도 자연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처럼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각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정당하게 해 줄 아버지를 찾는 방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는 결단, 그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거짓이 됩니다.
실제로는 내가 섬기는 사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이용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기 전에 내가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거짓은 나를 관계의 행복보다는 생존의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사춘기가 되어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서 그분을 아버지로 선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