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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3-26 조회수 : 467

요한 11,1-45 

삶의 활력은 어디 위에 내리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를 얻는데, 이것이 삶의 활력이 됩니다.

반면 성령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죽음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이를 무기력증이라고 합니다. 

 

무기력증은 번아웃과는 다르게 삶의 에너지는 있지만,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잃었을 때 옵니다.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을 받고 부와 명예와 가족을 일구며 살았던 우리가 어쩌면 가장 부러워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다”라고 하며 엽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왜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고도 삶의 의욕을 잃었을까요? 

 

마를린 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평생 쓸 돈을 다 벌었고 많은 남성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삶의 활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싶었고 결국 약물 과다복용으로 36세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 같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바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인정이 바로 성령과 같습니다.

자녀에게는 부모에게 받는 인정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리 밑 어딘가에 있다는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다른 무엇도 하기 싫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의 친부모이고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다 헤쳐 나갈 힘이 생겼습니다. 

 

삶의 활력은 이렇게 나의 창조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그분들을 믿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성령을 불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자기 죽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그리고 이것이 삶의 활력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제단에 황소를 바쳤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나를 봉헌할 때 하늘에서 나를 성령으로 사르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자 삶의 활력입니다. 

 

엘리야도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자신이 봉헌하는 제물을

사르게 하였습니다(1열왕 18장 참조).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서 ‘성령의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활력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못하여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창조자로부터 받는 인정입니다.

피조물의 유일한 삶의 활력은 창조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성령을 강력히 체험했을 때는 모두 ‘믿음의 순종’에 관련된 일이 있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나는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너무 외로웠습니다.

죄를 짓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가슴으로 느껴진 때가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데 

 

귀밑으로 스치는 바람이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부터 외로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 분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활력이 됩니다.  

 

또 사제서품식을 앞두고 피정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사제로 불러줬다는 확신만 주신다면

사제생활을 힘차게 해 나가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러나 피정 마지막 날까지 어떤 응답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날 실망하여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마지막 잎새를 단 한 나무에서 그 잎새가 그 순간에 떨어지며 주님께서 저를 창조 이전부터 사제로 불러주셨음이 믿어졌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주님의 뜻 위에 믿음으로 순종하려고 자신을 봉헌하는 제물 위에 삶의 의미를 내리셔서 그 사람을 불타게 하여 활기차게 살게 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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