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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3-13 조회수 : 568

루카 4,24ㄴ-30 

화가 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부한 상태인 이유 

 

채종기 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분노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우리나라의 오랜 상징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범행 당시 68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 전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이런 망언을 늘어놓습니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런 문화재는 재복원하면 되잖아요.” 

토지 보상은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건설사는 약 1억 원의 감정평가를 내렸고 채종기 씨는 5억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분노를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채종기 씨의 경우처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마치 일부러 화가 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분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의 예를 드십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와서 자신들이 메시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말에 분노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반복됩니다. 감정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여러 감정을 말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 가지인데 투쟁-도피-경직의 세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은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위협에 다시 직면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달아나게 됩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생각합니다.

‘담부턴 이 산에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나라는 뭐 하는 거야?

저런 멧돼지를 잡지도 않고. 아 짜증 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렇게 감정은 생각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을 인식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몸의 반응은 생존을 위해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의 아미그달라라는 생존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연결된 것이 자율신경계입니다.

자율신경계는 몸의 근육이나 장의 운동, 심박수나 체온 등을 담당하는데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붙어있습니다. 

 

대뇌는 생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변연계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뇌는 신체의 변화를 해석하여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그때의 기억보다도 감정을 기억하며 그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삶을 유지합니다.

이 역할을 전두엽이 합니다.

전두엽은 인간만이 가진 가장 발달한 뇌의 부분입니다.  

 

자 이제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생존을 포기하면 됩니다.

생존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존을 포기할까요? ‘평안’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 해답을 압니다.

자신의 생존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대상에게 마치 보험 들 듯이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네 살 아이가 호흡 곤란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부모보고 자신을 안아달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안으면 자신은 부모를 더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존재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서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부모의 포옹에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에 더는 잃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잃을 생명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부모의 품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나 화, 두려움 등이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시 생존권을 내어 맡길 대상을 만나지 못한 이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나의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품에 맡깁시다.

그러면 모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보험입니다.

왜 돈에 대한 보험은 들면서 감정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 것일까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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