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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3-09 조회수 : 515

루카 16,19-31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사람을 알아가는 4단계 

 

영화 ‘빅 피쉬’(2003)는 아버지의 인생을 그의 아들이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들 윌리엄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매우 흥미진진한 아버지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허황된 전설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성장하여 기자가 된 아들에겐 거의 헛소리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들은 성장할 때 아버지가 거의 함께해주지 못했으며 집에 가끔 올 때마다 그런 허황된 이야기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와 3년째 대화를 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암이 걸려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신한 애인을 데리고 아버지에게 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큰 물고기에게 반지를 빼앗겨 그것을 잡느라고 엄마와 결혼식도 못하고

아들이 태어날 때도 함께 해 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화가 났지만, 기자답게 차근차근 아버지의 기록들을 훑어봅니다.

그랬더니 분명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들에 진심이 담겨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했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실에 기반하여 1%의 이야기로 각색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군대에 가시느라 어머니와 결혼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 외판원으로 전국을 떠돌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미안함을 이야기를 만들어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작가답게 맺어줍니다.

바로 자신이 아버지가 만났던 동화속 모든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아버지를 강물에 담가주니 아버지가 커다란 물고기가 되어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는 결말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이야기에 동참해주는 아들에게 흡족해합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

아들은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상상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다 허황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떤 것들은 진실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진심이 담겨있습니다.

교회 전통적인 성경을 읽는 법은 ‘읽기(Lectio)-묵상하기(Meditatio)-기도하기(Oratio)-관상하기(Contemplatio)’의 4단계입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말씀은 읽기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아버지의 삶을 조사하며

그 이야기들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내는 과정이 묵상입니다.

그런다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완성시켜가는 단계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거의 ‘봉헌’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것에 내가 가진 것을 보태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미사로 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읽기이고 강론을 듣는 것이 묵상이며 봉헌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관상을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한 것처럼 나도 자녀에게 하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알아가든, 하느님을 알아가든 이 네 단계를 거스르거나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표하는 부자는 묵상과 기도의 단계는 뛰어넘고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곧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분명 우리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믿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표징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무서워서 물건을 부활한 라자로에게 집어던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그 부활의 상징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나도 무언가 보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봉헌으로 이어져야 하고 봉헌 없는 성체는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을 믿지 못하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말씀부터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해석해 준 것에 고마워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집에 초대했을 때 그들은 부활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엠마오의 제자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이미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상을 시켜 봉헌하게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가르칩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께 봉헌드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도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좀처럼 믿기 어렵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것을 그분이 받는 것을 보아야만 그분이 나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감사해야 나옵니다.

감사하려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일 미사 때 거의 봉헌을 하지 않습니다. 봉헌하지 않으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성체 안에서 표징을 발견하고 믿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여 감사한 봉헌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될 것입니다. 

 

미사 때 봉헌의 의미를 다시 되살리는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체는 끝가지 의미 없는 형식에 머물게 됩니다.

말씀을 다시 살려냅시다.

그 증거는 빅피쉬의 이야기를 끝낸 아들처럼 감사의 봉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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