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들 오늘 예수님의 당부 말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생각해보십시오.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은 사람, 우리 가정을 풍비박산 낸 사람, 사랑하는 내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눈에 피눈물 나게 만든 사람,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 사랑, 말은 쉬운데, 정말 어려운 숙제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불가능한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요 며칠 백번 천번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104주년 삼일절 기념사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성의 없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은 설마 하는 탄식과 함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할 표현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랫사람을 극도로 신임하는 것인지?
내용을 읽다 보니, 정말이지 일본 총리의 기념사라고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일본 내 극우파, 국내 친일파가 극찬하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 강점의 책임이 야욕과 사심으로 가득 찼던 일본제국주의에 있지 않고, 세계사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었다는 표현은, 일제 강점과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그릇된 식민사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쪽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받은 상처와 손해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일본을 향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 운운하는 것은, 그들 앞에 먼저 고개를 조아리는 굴종 외교, 종속 외교를 시작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평화롭게 지내던 우리 집으로 옆집 사람들이 담장을 허물고 넘어왔습니다.
집안의 기둥인 듬직한 아들은 꽁꽁 포박해 끌고가 죽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도 끌고가 몹쓸 짓을 하고 팔아넘겼습니다.
집문서 땅문서를 비롯해 쓸만한 가재도구는 다 쓸어갔습니다.
성도 이름도 자기들 것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그토록 끔찍한 만행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데, 그 피해 가정의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일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입니다.
지난 일 자꾸 되새김질해봐야 좋은 것 하나 없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이제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 다 잊고 우애 깊은 형제로 지냅시다.”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만행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 진정성 있는 사과, 다시는 동일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 그에 따른 정확한 손해 배상!
아마도 우리는 지상 생활 내내 근원적 결핍, 근본적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는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불완전하니까요.
언젠가 우리가 지상 여정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토록 어려워 보이는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처럼 완전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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