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이것부터 연습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실천법으로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죄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법입니다.
원수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심판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려면 심판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3-4.8-9)
제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차별의 예로는 L.A. 흑인 폭동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흑인 학생이 도둑이고 그가 총을 꺼낸다고 여겨서 총을 쏴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면 나도 분명 차별받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먼저 내가 차별받지 않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크래쉬’(2004)는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 도로 한 복판에서 울리는 총성. 젊은 백인 경찰관 핸슨이 한 흑인 청년을 쏴 죽입니다.
핸슨이 흑인 소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흑인 청년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위협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총으로 그 청년을 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흑인 청년은 둘 사이에 꽤나 재미난 공통점을 공유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흑인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것은 당지 작은 성 크리스토포로스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흑인 청년을 쏴 죽인 이 ‘핸슨 결찰관’은 불과 36시간 전의 대낮에는 다소 의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선배 경찰관인 라이언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상관에게 근무 파트너를 바꿔달라고 청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극도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차별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차별과 편견의 굴레에 살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라이언 경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아마 핸슨이 불과 이틀도 안 되어 차별의 굴레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이 영화에서는 아랍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받은 한 사람이 멕시코인 열쇠 수리공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차별받지 않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면 그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인정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천대 받던 시절, 수학 천재 라고 불리던 흑인 소녀가 수많은 차별속에서 결국 NASA에서 인정받기 까지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6학년인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뛰어난 수학실력으로 교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인정받음으로 견디기 힘든 인종차별을 견뎌내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냅니다.
그때 교수가 백묵을 주며 문제를 풀어달라는 청을 받은 것처럼, 나사에서도 그를 지지해주는 백인 상관으로부터 백묵을 받아 정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어보입니다.
예수님은 차별받지 않으셨을까요? 성모님은 차별받지 않으셨을까요?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차별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인정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당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차별받지 않는데 누구를 차별하겠습니까?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죽었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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