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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6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2-26 조회수 : 343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파스카를 향해 정향 되어 있다. 이 사순절의 긴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4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볼 때, 하느님과의 만남에 앞서 갖게 되는 특별한 긴장의 시기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 광야에서 헤맨 것(신명 8,2-4), 모세가 산 위에서 보낸 40주야(탈출 34,28; 신명 9,9),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밤낮으로 걸어간 40일(1열왕 19,8)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주위와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사순절 동안 우리를 내적 순례를 통해 우리의 과월절 양(1코린 5,7)이신 그리스도와의 기쁜 만남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복음: 마태 4,1-11: 예수께서는 40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40일간의 체험에 우리의 깊은 관심과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비둘기 모양으로(3,16) 내려오셨던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유혹을 받게 하신다. 그런데 이 유혹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 17)라는 말씀 후에 나오는 것으로 메시아적 유혹이다. 사탄은 두 번이나 이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5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 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마태 27,42 참조). 

 

예수님의 유혹은 오랜 단식 후에 빵을 얻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일로부터 우상을 숭배하도록 종용하는 본격적인 충동적 권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지는 유혹적인 발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탄이 권력과 부라고 하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묘한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일치로써 이기신다. 그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결정의 근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세 번 성경에(4.7.10절)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당신의 결정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뜻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빵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 창조와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래서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냐 파멸이냐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창세 3,3 참조). 사탄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하여 그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정말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알몸인 것(7절)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사탄의 말을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행동은 죄를 낳게 되었고, 모든 세상을 파멸로 이끌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원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적인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회복시켜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부지런히 이루어 가는 것이 사순절을 잘 지내는 것이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본다면, 그 유혹은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괴롭혔던 유혹이었다. 바로 그 유혹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도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신뢰하며 그 유혹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 있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능히 그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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