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사랑의 증인
[말씀]
■ 제1독서(레위 19,1-2.17-18)
레위기는 매우 비현실적인 작품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세계와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나 실현가능할 것 같은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법 규정들을 상세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레위기의 몇몇 본문에서 작품의 역동성을 쉽게 간파할 수있다.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초대된 존재이기에, 형제들에게 온전히 열려 있기 위해서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앙갚음하지 말고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제2독서(1코린 3,16-23)
코린토교회 신자들 사이의 분열을 강하게 질타한 다음, 사도 바오로는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근거와 동력이 무엇인지 밝힌다. 개별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신자들은 하느님의 성전이기에, 그분이 선사하시는 참된 지혜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 지혜는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과 같은 인간의 비뚤어진 지혜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이끈다. 코린토교회가 그리스도의 종들에 불과한 바오로, 아폴로, 게파 등을 내세워 분열을 초래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편협한 지혜 때문이었다.
■ 복음(마태 5,38-48)
시나이산에서 체결된 옛 계약의 중개자 모세가 사회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중심으로 법 규정들을 나열해 나갔다면, 예수님은 이 규정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을 지적하고 보완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악행을 열거하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성문화하는 데 만족했다면, 예수님은 이 악을 온전한 사랑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이 선포하고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의 나라는 보다 완벽한 신앙자세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을 향해 마음이 온전히 열려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새김]
■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좀 더 인간다운 사회,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살맛 나는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여전히 미움이나 앙심으로, 아니면 최소한 불신으로 머물러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를 개선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사회구조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지혜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시공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지혜, 근시안적이거나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 있는 인간의 지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할 것을 촉구하신다. 그분의 가르침은, 단순한 정의의 차원에서 제정된 법규들, 복수(復讐)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목적으로 제정된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에 기초한 법규들과 비교해 볼 때, 보다 근원적이다. 주님은 오늘 복음의 가르침들, 예를 들어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등과 같은 근원적인 가르침들이 인간 사회의 가장 자연스러운 법규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비폭력을 역설하신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증오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사랑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신다.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이에게 똑같이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은 우리 모두 그분의 모습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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