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38-48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원수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도 똑같이 당해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거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느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대표적인 사례가 손양원 목사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의 사면을 위해 애썼고 그가 사면되자 그를 양아들로 삼아 같이 살면서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러한 용서와 사랑이 어떻게 하면 가능했을까요?
그분이 두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밤새 울며 기도한 다음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믿음’입니다.
우선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아기가 누군가에게 자기 장난감을 빼앗기면 그 누군가를 원수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장난감을 빼앗아 간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장은 이전의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를 쫓아오는 길거리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었소!”
그렇습니다.
용서하려면 이전의 나는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기 때 빼앗긴 장난감이 나에게 더는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 있었던 이전의 자신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 때 이미 이전의 자신은 죽어서 묻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용서하려면 자기 정체성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복수하는 심판관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도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내가 죽었다는 믿음은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사랑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로마 12,20)라고 말합니다.
손양원 목사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원수와 함께 식사했고 그것은 마치 자갈을 먹는 맛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쓸모 없어진 인간의 육체에 상처를 낸 인간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듯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바라보기에 불쌍히 여기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고 창조자는 부서진 물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는 믿음이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찌른 아들의 부러진 손톱을 어머니가 죽어가면서도 삼킨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게 아닙니다.
어머니니까.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지 않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상처를 잊게 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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