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7,1-13
하늘의 법을 세상 법과 타협시키는 교회라면?
여러분들은 언제부턴가 자녀의 상태가 사이코패스처럼 나중에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가 될 것임이 거의 확실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괴물들의 어머니’(Mother of monsters: 2020)는 이러한 발상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심한 장난을 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폭력을 일삼는 아들을 감시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온 집안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아들이 하는 행동을 감시합니다.
집에서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던 아들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한 어머니는 아들을 아버지 집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가지 않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CCTV와 녹화본들을 봅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복수할 차례입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 자신이 사이코패스였음을 녹화하게 시킵니다.
그리고는 결국 아들을 의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몰아갑니다.
엄마는 기지를 발휘해서 묶여 있는 곳에서 탈출하여 아들을 칼로 찌릅니다.
드디어 아들의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아들의 핸드폰에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보복으로 사이코패스라 취급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느껴보게 하고 싶은 것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를 죽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법을 철저히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이 세상의 법으로 될 것 같았으면 주님께서 새로운 법을 주러 오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법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더라도 자기의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자녀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위 영화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사회 심판을 받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이코패스였던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사실 사이코패스로 살면서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그러한 법입니다.
이 세상의 법은 각자의 생존을 위한 법입니다.
그 법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자녀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고 또 자신의 나라 이익을 위해 하는 전쟁을 합법화하며 자연 파괴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지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을 따릅니다.
해적선에서는 해적의 법을, 경찰서에서는 경찰의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준수해야 그곳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법은 해적선의 법일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그 배 안에서는 질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랑에 어긋나는 법입니다.
사랑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회 질서가 유지되게 만드는 것이지 온전한 사랑의 법은 아닙니다.
위 영화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지닌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면 모두가 적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에게 몸을 맡기는 법입니다.
어머니의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깨우쳐주기 위해 희생한 아들이 오히려 하느님 법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은 사람들의 규정을 교리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니 교리 차원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규정들을 앞세워 우리는 이 교리를 폐기하였습니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법적인 처벌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움이 들어옵니다.
위 영화의 엄마처럼.
만약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나는 튜브가 없고 다른 사람은 튜브에 타고 있다면 어떨까요?
튜브는 두 사람이 잡고 있으면 가라앉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튜브를 잡은 사람은 병약한 노인입니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튜브를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이 크게 보면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의 법도 결국엔 생존이 목적입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배가 자신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병약한 이의 튜브를 빼앗아 생존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 배에 올라서도 그러한 법에 적용받으면 어떨까요? 배를 빼앗기 위한 일을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는 물론이요, 그 배가 향하는 곳에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리 자신이 탄 배에서 그 도착하게 될 나라의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에 타서 하느님 법을 익히며 삽니다. 하느님 법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이 훈련을 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세상 법에 지배당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하느님 나라의 법이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지 않고서는 이 세상 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인지, 아니면 배에 탄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만 들어갑니다.
하느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어야 그 나라에 머물기 위한 사랑의 법이 의미 있게 됩니다.
내가 바다에 빠져있으면서 괜한 사랑의 법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위선 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법은 하늘에 속한 이만 지킬 수 있습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배에 탄 사람처럼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늘에서 온 분과 같은 지위에 올라가 있음을 믿고 그분이 되어 그분 나라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완전하지 않다면 자꾸 지상의 법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지상의 법을 버리고 천상의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법이 지켜집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느님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사랑이 증가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마음으로 아무리 사랑을 증가시키려고 해봐야 물에 빠진 사람이 억지로 사랑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만 지킬 자격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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