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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1-24 조회수 : 520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보스톤 해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갈매기들이 금방 친구를 알아채고 그의 발아래 모여들었습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용감하게도 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하였습니다.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고급 요리를 그야말로 마음껏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매일의 이 광경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화를 내며 “비싼 새우를 새들에게 낭비하다니 너무하다.”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사실 그 노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뢰를 발사하여 그의 배를 격침시켰습니다.

이에 그와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구명정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의 어려움을 당하며 몇 날을 보내었습니다.


부하들은 한 명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장군을 비롯한 몇 명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장군도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굶주림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순간 바로 옆에 작은 흰 물체가 안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갈매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을 천천히 뻗쳐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그 갈매기는 몇 시간 수명을 더 연장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고 그 몇 시간은 그가 섬을 발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섬에서 안전을 찾고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자 사람들을 보스톤의 갈매기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 장군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 막달레나로 알려져 있는 한 여인이 2천만 원에 달하는 향유를 깨서 예수님께 발라드릴 때 유다는 그것이 아까워서 화를 냅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초에 루치펠이라는 대천사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에 화가 나서 하느님께 반란을 일으켜 사탄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잘 해 주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보스톤에서 갈매기에게 비싼 새우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갈매기에게 귀한 것들을 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받기만 하면서 그만한 보답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 묵상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당시 아일랜드에 사셨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저에게 해 주신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면, 혹은 모르는 사람이 청한 것이었다면 공부하는 중에 인터넷에 매일같이 묵상글을 올릴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올리기 시작하였지만, 사실 그분들께 감사한 것이 있어서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까지 하시고 죽을 라자로까지도 살리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이를 살리는 권능을 아버지께 청해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청해도 저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따르신 분이고 저는 한 명의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그리스도를 시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아멘!’으로 따르셨기 때문에, 그만한 청을 해도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고위층 유다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물론 그는 진흙이 발라진채로 실로암으로 뛰어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임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그를 설득시키려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이렇게 말하며 끝까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죄 없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9,31.3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청이나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성녀 제르뚜르다에게 누가 와서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제르뚜르다는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녀의 기도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도 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누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느냐 안 들어주시느냐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분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의 첫 기적을 얻어낸 것입니다.

성모님 외에 누가 그 기적을 얻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성모님 외에 감히 ‘불필요한데도’ 남의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없으니 기적으로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당당하게’ 청할만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성모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당당하게’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하시며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당신에게 그 정도도 못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첫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모님을 비하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시고 일부 그리스도교 교파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보는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큼 확실히 성모님을 들어 높이는 복음도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평가는 바로 하느님께 청한 것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께 청해서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성모님만이 온전히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 합당하게 불릴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당신은 모든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을 따라올 여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분이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한다면, 또한 그리스도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성모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청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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