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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1-14 조회수 : 556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말씀의 칼은 영과 영혼을 구분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 속에 묻혀 지내기를 좋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평가도 받지 못하면서 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있으려고 해도 조용히 있지 못합니다. 마음 안에 꿈틀대는 뜨거움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런 이들이 이끌어갑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물소(버팔로)는 인디언들의 전부였습니다.

식량이자 도구였으며 신발이었고 옷이었고 집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디언들의 생명과도 같은 버팔로들이 쓰러져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재미로 혹은 인디언들의 주식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 버팔로들을 무작정 죽인 것입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2년 동안 370만 마리의 물소가 죽었는데 그중 355만 마리가 백인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한 백인 사냥꾼 윌리엄 코디(William Cody)는 인디언들의 주식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며 자그마치 4,280마리의 버팔로를 혼자 죽였습니다. 

 

현재 미국 네브라스카 인근에는 버팔로 빌을 기념하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반항하면 백인들은 무력으로 인디언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가장 악랄했던 미국의 제7기병대가 운디드니(Wounded Knee) 강 부근의 계곡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우족 2백여 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래 어떤 인디언도 백인들의 총과 대포 앞에 반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서 만성적인 실업, 알코올중독, 범죄 등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때 미국의 영웅이었던 존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제7기병대를 대파했던 인디언의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성난 말)라 불렸던 ‘타슈가 위트코’였습니다. 

 

땅을 팔라는 백인들의 강요에 “자기가 걸어 다니는 땅을 팔아먹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며

그 무시무시한 제7기병대에 맞서 승리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먹을 것이 사라져버린 땅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백인에게 항복하고 처형당하여

운디드니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얼굴이 미국 땅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러시모어산에 미국의 영웅들을 조각했던 크자크 지올코브스키는 크레이지 호스의 정신에 감명을 받아 러시모어산과 불과 27km떨어진 돌산에 거의 50년 동안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작업은 다음 세대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크자크는 말합니다. 

 

“나는 인디언 후원자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전하는 돌 속의 이야기꾼일 뿐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참조: EBS 지식채널 19, Crazy Horse]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돼 있다며 세상에 순응하며 살라고 사람들은 충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 안에 어떤 뜨거운 불이 있어 그냥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불입니다. 

성령을 받고 사도들은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은 조용히 있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하고 싶어서 하는 선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미지근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장소는 내 안의 가장 깊숙한 ‘영’의 자리입니다. 이 영이 평소에는 영혼과 큰 구별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영이 무엇이고 영혼이 무엇인지 구별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께서 그 영 안에 자리를 잡으면 그 영 때문에 영혼이 골치가 아파집니다. 

 

자신은 편하고 싶은데 더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밖으로 솟아나오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입니다.

영은 뛰쳐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데 영혼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이 대치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이 뚜렷이 구분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말씀을 통해 부어주시는 성령 덕분으로 자신의 영혼이 지금까지 영의 작용을 가로막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영혼은 마치 지구 핵의 그 뜨거운 기운이 지구의 맨틀에 막혀 있어서 지각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영이고 영은 영혼을 설득하고 영혼은 육체를 설득하여 자신의 뜻을 피려고 하는데 그 반대되는 뜻을 지닌 영혼과 육체의 성향이 뚜렷이 구분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친구를 다른 친구들이 사창가로 끌고 갔습니다.

자신들의 친구라 여겼던 그 사람은 자신 안에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몸부림을 치다가 옷도 찢어지고 상처도 났습니다.

자신 안에 말씀을 간직하면 반드시 세상과 구별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구별이 쉽지 않습니까?

말씀의 칼은 성령인데 성령은 모든 이를 명확히 구분되게 합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은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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