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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1-03 조회수 : 567

겪어보면 보이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인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입니다.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드러내 보이셨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보라고 하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말합니다.
보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해서이고, 겪어봐도 오해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전에 합천 우체국 택배 배달이 시작되면 이런 문제가 보내집니다. 
“누구님이 보낸 택배 배달 예정. 합천 우체국 오세용.” 
 
많은 사람이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항의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자를 보내는 분이 우체국 직원 오세용씨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제대로 보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컬투쇼에 나왔던 사연입니다.
집 근처 주유소에 알바 하는 남자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 눈도장도 찍을 겸 매일 휘발유 1리터씩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경찰들이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유소 알바생은 그 여학생이 유력하다고 증언해 1차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용의자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겪어봐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겪어본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겪어 ‘본다’라고 하듯, 머문다는 말은 ‘본다’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요한은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그리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야 머무는 힘을 줍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희망이 그들을 성전에서 평생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바라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보게 되고 보면 믿게 됩니다.  
 
페르시아전쟁 때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막대한 보물을 파묻어놓고 전사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테베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신전에 빌자 제우스가 말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돌을 뒤집어보라.” 
 
노력하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면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머물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 5분도 안 읽고 기도 5분도 안 하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문다고 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오래 같이 살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를 모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만, 혹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와서 평일 미사에서도 봉헌금을 걷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잘 알고 오랜 세월 알아 왔는데도 혹시 돈을 많이 걷어서 제가 어떤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성전도 최소한으로 지어야 하고 성당에서 걷은 돈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를 위해 다 쓰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그분은 제가 돈을 많이 걷어서
저의 영광을 위해 쓴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의 도구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가득 차 있으면 어둠만 보이고 빛이 있으면 빛이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보려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보려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봅니다.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려면 머물려야 합니다.
머무르되 사랑을 증가시키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이고 보면 증언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으로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당신께서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도 볼 줄 안다고 말하면 죄인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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