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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2-29 조회수 : 512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관상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신성을 보는 기도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기도에서 ‘거둠의 기도 – 고요의 기도 – 일치의 기도’라는 세 단계를 말합니다.
거둠의 기도는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에서 다른 세상 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분의 자취가 있는 곳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으면 거둠의 기도가 불가능합니다. 
 
고요의 기도는 마치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시듯 그 기다림이 끝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성령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깨닫고 인내롭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기다림이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다림의 대명사가 나옵니다.
바로 시메온 예언자입니다. 
그가 기다릴 줄 알았던 이유는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5-26)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다림이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던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물론 묵상기도에서도 기다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나로부터의 정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해 본인 스스로 제사를 지내어 결국 그 이유로 왕권을 잃게 됩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알게 하여 주도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기다림이 주제인 대표적인 작품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지루한 기다림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봅니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과 춤추기….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그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그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입니다.
소년은 고도가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란 전갈만 주고 갑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포조와 럭키를 만납니다. 포조는 주인이고 럭키는 포조의 줄에 목이 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노예입니다.
며칠 뒤에는 주인이 눈이 먼 상태로 럭키를 끌고 갑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고도를 기다리며 그 넘어진 주인을 일으켜 세워주고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소년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전갈을 남깁니다.
그렇게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고도가 도대체 누구일까요? 작가가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만약 알면 책에 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고도가 오리라는 약속을 믿고 매일 기다립니다. 
 
하지만 포조와 럭키는 내가 주도적이건, 혹은 끌려다니건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도대체 그렇게 살면 뭐가 좋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오기를 4천 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이 정화되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성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이는 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기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믿음에서 옵니다.
두 번째는 나에게 기다려도 시간 내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능력이 있음을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는 결단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분명히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본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나타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분명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놀이에서 놀이하는 사람은 술래의 목소리와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나는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생깁니다.
사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기다릴 줄 모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기다릴 줄 몰랐던 이유는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더 믿었기에 기도와 제물을 바침이 의미를 잃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다릴 줄 알기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제물을 잘라놓고 하느님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기다림을 통해 아브라함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제물을 불사르는 성령께서 그에게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관상기도는 내 안의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집중하는 시간, 곧 ‘거둠의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고요의 기도’입니다.
고요의 기도는 평화가 오는 시간입니다.
기다리던 분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기다림을 통해 성령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평화가 옵니다.
성령은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다음엔 ‘일치의 기도’입니다.
다시 그리스도께서 보이시지 않고 그분의 ‘뜻’이 남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이 되어야 하는 소명이 주어졌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뜻으로 나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을 때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안에 들어가면 ‘하나’가 되어 상대를 볼 수 없습니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태중의 예수님을 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분의 뜻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항상 이 세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보여주심을 믿고 그분의 현존에 집중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을 위해 가장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믿고 기다리고 기도함이 나를 온전히 정화했다면 그분이 분명 나를 사로잡을 고요의 기도로 올라가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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