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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2-27 조회수 : 695

하려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기도, 관상기도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관상하는 단계에까지 올랐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요한 1,17-18) 
 
요한은 그리스도와 3년을 함께 하였고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어 비밀스러운 것까지 물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뵈니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고 정확히 기록한 이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보는 것을 우리는 ‘관상기도’라 합니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그분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신성, 곧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굳은살을 관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부모님을 보는 것과 그분이 고생한 흔적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님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 곧 부모님의 영광을 보아야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의 영광, 곧 사랑의 표현, 어쩌면 표징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1코린 3,17-18) 
 
이는 분명 관상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변하는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세처럼 얼굴에 너울이 씌워져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어땠어야 할까요? 부모님의 영광, 곧 부모님의 사랑을 보았어야 합니다.
처음에 부모님을 의심할 때는 부모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리 밑으로 진짜 어머니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굳은살을 통해 부모님의 영광을 볼 때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 사랑을 믿고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도착합니다.
물론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궁금하기도 했을 테지만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보고 나서야 요한도 들어갑니다.
요한도 분명 무언가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장으로 뽑아주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이 능력이 오히려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관상기도는 사실 원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지 못하면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보면 애정결핍으로 부모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부모를 괴롭히는 금쪽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히는 이유는 단 하나, 불안함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녀임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모는 더 지쳐갑니다.
그래서 더 조를수록 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을 혼자 키울 때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힘들게 자신을 키운 부모의 손을 잡아주고 발톱을 깎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줍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힘이 냅니다.
그렇게 더 높은 사랑의 표징이 나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표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은 지칩니다.
그러면 그들을 관상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관상기도는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더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먼저 지금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영광은 발밑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발을 만져보고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면 그 영광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볼 때는 라면 한 그릇도 그분들의 살과 피가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께서 주시는 모든 사랑 안에서 그분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두 분이 써 보내신 편지는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모의 영광은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따라서 내가 겸손하여지지 않으면 그분들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위만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그분의 영광을 봅니다.
제가 어머니께 드린 용돈을 어머니는 쓰셨을까요?
저에게 다시 주기 위해 하나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다 모아놓으셨습니다.
감사해야 그분이 지치지 않고 더 큰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무덤은 그저 그분께서 묻혔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무덤뿐입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한없이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 남긴 자취가 무덤뿐이었기에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남겨놓은 사랑에 머무를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 영광을 찾으려 해야 할까요? ‘성체’입니다.
보잘것없는 밀떡이지만 그 밀떡 안에 완전한 하느님 신성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냐고 물으면 신자들은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려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직접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육체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남겨놓고 간 흔적에서 그분을 발견하려고 머물러야 합니다.
이 겸손함이 진정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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