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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2-23 조회수 : 673

나의 이름이 누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인지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신호등 대기를 하는 중에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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