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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2-22 조회수 : 569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셨을 때, 혹은 낳으셨을 때, 혹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가 가장 기쁘셨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도 기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 것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모님의 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기쁨은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평화가 오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 곧 사랑의 선물입니다.  
 
제가 부모가 나의 참 부모임을 믿으려 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들, 예를 들면 부모의 발에 박힌 굳은살을 볼 때 참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무덤에 홀로 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기쁨에 찼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다른 기쁜 무엇을 찾아도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계시고 나의 창조자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 기괴한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바로 엄마가 아이 둘을 쌍 수유하는 장면입니다.
여섯 살 딸과 모유를 먹어야 하는 갓난아기 동생을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하는 것입니다. 
 
여섯 살 아이는 분명 애정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사랑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엄마의 모유를 원합니다.
재밌는 것은 엄마가 때가 지난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엄마로 자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기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끊지 못합니다. 
 
사실 아이보다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엄마도 부모로부터 애정결핍의 감정이 있고 자녀에게 애정을 듬뿍 주면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17회에서는 더 기괴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유 수유와 변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이요,
여섯 살짜리 딸을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엄마는 젖을 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도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애정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의 어머니가 돌보아 주지 않은 상처를 자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자녀는 엄마에게 업히고 젖을 먹으며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에는 불안함에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참 기쁨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랑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선교할 때 더 완성된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 안에서 관상까지 도달하여 주님의 사랑을 느낀들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은 불안함에 휩싸입니다. 
 
결국 내가 느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가장 확신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자녀에게도 참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젖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들은 때가 되면 단호하게 젖을 떼게 합니다. 더 큰 기쁨으로 새끼들을 보낼 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그 기쁨을 전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기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만 하는 것보다 그 기도한 것을 전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였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셨을 때 가장 기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때보다, 성령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을 때 가장 기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성령을 흐르게 할 때 기쁨이 완성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쁨으로 충만하고 다른 이를 성령으로 기쁘게 한다면 그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울증에 자살 직전이었던 어떤 자매가 마더 데레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 여인에게 상담해 주지 않고 자신의 봉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만에 우울증이 가셨습니다. 성령님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닉 부이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우울증은 타인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요한복음 9장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생 소경이 다 하느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이유가 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의 기쁨을 타인에게 전할 때 기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고 가야 할 유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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