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전해주기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는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하여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옷을 벗을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쉬고 나서 옷을 벗었을 때, 어떤 수녀 한 사람이 자신에게 더운 물을 가져다 달라고 청했습니다.
성녀는 무척 피곤하였고, 방에서 주방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며, 비포장이기에 진흙이 발목까지 차올라오는 길을 가야만 했지만, 얼른 옷을 도로 입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성체가 들어있는 성합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성합을 들어서, 감실로 가져가라.”
처음엔 망설였지만, 성합 가까이 가서 성합에 손을 대자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네가 나에게 다가올 때에 가지는 그런 사랑으로 수녀들을 대하여라.
그리고 무엇이든지 네가 그들을 위해서 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잠시 후에 수녀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당신 아드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듣자 성령으로 가득 찼고 그 태중의 아이도 기뻐 뛰었습니다.
성모님의 이 행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했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살던 당신의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해 당신도 임신한 몸이지만 먼 길을 걸어 방문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임신하였다는 것은 본인에게는 기쁨일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험담거리도 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 함께 잉태하게 된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아직 요셉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우선적으로 엘리사벳을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파우스티나 수녀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나서 보게 된 것이 성합입니다.
성합 안엔 그리스도께서 담겨 계시고 사제들만이 감실에서 꺼내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가 미사 중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 신자들에게 가서 나누어 주는 행위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에게 가서 성령님을 전해주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그 성령님의 불을 엘리사벳에게 옮겨 붙이십니다.
성령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불은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들에게 옮아붙어 그가 기쁨으로 뜁니다.
세례를 받고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지상교회를 상징하고 그 잉태된 아기는 바로 성령을 통하여 매일 새로워지는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을 포함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하느님을 세상에 오시게 하신 유일한 믿음의 통로이고, 성모님만이 참된 성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없으면 그래서 성체성사도 없고 성령의 은혜도 전달될 수 없습니다.
사제들은 마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과 같이 성합에 든 성체를 옮겨 신자들에게 주며
그들 안에 성령님의 힘으로 또 다른 그리스도께서 잉태하시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잉태한 모든 신자들은 또한 성모님이나 미사 때의 사제가 성체를 통한 성령님을 전달해 주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주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더 이상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옮겨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곧 성령님이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다른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마치 성합을 들고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제의 모습과 같고,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성모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을 하고 온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임무를 완수했으니 성합을 다시 감실로 옮겨놓으라는 환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받는 사람 안에는 그 사랑을 통해 또 다른 그리스도께서 잉태하게 되시니 이웃을 위해 실천한 사랑은 곧 그 새롭게 잉태되시는 그리스도께 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녀들에게 한 행위가 모두 당신께 한 행위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성체를 전해 주는 행위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엘리사벳을 방문한 행위나, 더 완전하게는 성령님께서 성부로부터 아드님께 오시는 행위는 모두 ‘중재’라는 단어로 집약됩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오늘도 미사 후에 우리 또한 성합을 모시고 이웃들에게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그 안에 든 그리스도를 전해줄 결심을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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