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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2-18 조회수 : 528

나는 언제 임마누엘, 예수님은 원하게 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야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사실은 너무 명확합니다.
팀 호잇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마라톤을 하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눈만 껌뻑일 수 있는 모습의 아들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달릴 때 장애를 잊은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이것에 감동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줍니다.
그래서 대학도 졸업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창조자와 머물면 이전의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달려주면 자신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만을 따를 것을 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안 오십니다.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엄마보다, 엄마가 원하는 공부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마트폰을 빼앗고 게임을 지우고 엄마를 바라보게 해야 할까요?
물론 그러면 아이는 살아남아야 해서 어느 정도는 엄마를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 힘으로 스마트폰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거의 게임 중독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고 오직 스마트폰에만 의지하려 하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가 나옵니다. 다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이가 스마트폰을 향한 욕망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때 금지하면 아이에게 게임에 대한 욕망을 더 증폭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모 먼저 죄와 집착은 고통임을 알아야 이렇게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질리도록 하게 내버려 두고 부모는 아이를 잠시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불안하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정말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인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인지.
아이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그것을 빼앗고 부모와 억지로 머무는 것이 좋은 것임을 강요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 없이 스마트폰만 보는 것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신학교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혼하지 못하는 삶을 평생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제 서품식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집에 남았습니다.  
 
집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좋지 못한 비디오를 보며 게으른 짐승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매우 비참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야 다른 것이 행복하게 보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만지려고 할 때 엄마는 아이의 손을 살짝 데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거부만 한다면 아이는 그것에 대한 환상을 계속 품습니다. 
그리고 그 환성을 키워나갑니다.
만약 그 환상이 믿음이 된다면 고통스러워도 자기 믿음을 바꿀 마음이 없어서 중독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일찍 일찍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고통임을, 심지어 부모를 잃어버리게 됨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미지근한 사람을 뱉어버리십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하늘과 땅의 중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듭니다.
법을 통해서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다가와서 명령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죄를 짓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주님과 머물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더 신앙을 갖기 어렵게 만듭니다. 
지옥까지 갔다 오게 해야 합니다.
무책임한 것 같지만 이것이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식입니다.
그 지옥에 있는 이들만, 그 어둠에 있는 이들만 빛의 소중함을 압니다.  
 
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초등학교 때 술과 담배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술은 쭉 하고 있고 담배는 그때 맛을 보고는 맛을 느끼지 못해서 피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였습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놓아주면 아이들은 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참기 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술과 담배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부모님이 그것을 말렸다면 저는 지금도 술주정뱅이와 담배꽁초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맛의 향수를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술도 마시지만,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담배는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렸을 때 술과 담배였지만, 이것이 결혼이나 돈을 버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아이들은 압니다.
하나를 실컷 해 보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임을, 별 게 없음을, 그래서 최대한 이른 나이에 아이들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것과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하.사.시.를 통해 저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이 더 믿어졌기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을 해 보지 않아도 술과 담배를 피우는 것과 그때 생각한 결혼의 환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끝장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죄의 쓴맛을 톡톡히 보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하지 책임질 수 없는 상태로 막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위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때 반발심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매춘과 대마초와 같은 마약이 합법입니다. 
술집에 들어가면 대마초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길을 지나가면 빨간 불 밑에 아가씨들이 유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계 범죄율 거의 최저인 나라가 네덜란드란 것입니다. 
오히려 합법화 시키니 그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춘이 불법이기는 해도 네덜란드보다 성범죄가 훨씬 많습니다.  
 
네덜란드는 마약, 매춘, 동성애, 안락사, 공원에서 성관계 허용 등을 합법화해서 그것을 통제 못 하면
범법자가 아닌 아픈 사람으로 여기고 치료해줍니다. 
그것을 한다고 범법자로 만들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아픈 사람임을 깨닫고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범죄자에서 갱생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아픈 사람이 치료받으러 오는 것이 어려울까요?
당연히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여기는 사람이 갱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부모가 자꾸 자녀에게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은 자녀를 아픈 사람이 아닌 범죄자로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갱생이 더 어렵습니다. 
놓아주고 풀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부모와 머물기를 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죄의 지긋지긋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게 됩니다.
죄가 싫고 나로 사는 게 싫어졌다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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