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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2-17 조회수 : 485

영성의 세 단계 
 
 
저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그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늦게 결심해서 들어온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동기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만약 형이 하느님께 가면 하느님은 잘 살았다고 칭찬해 줄 거야.
그러나 누구와 함께 왔느냐고 물으면 뭐라 할 거야?
동료들이 옆에서 쓰러져가고 있는데 혼자만 왔느냐고 하면 뭐라 대답할거야?
쓰러지는 친구들과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고민하는 친구와 함께 고민해 줄 수는 있지만 함께 쓰러지는 것이 사랑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내가 굳건히 서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든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병을 더 잘 알기 위해 자신도 병이 드는 의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잘 산다.’는 말을 여러 번 듣다보니 스스로도 내 자신이 좀 냉혈인간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혼자만 열심히 살려고 하는 가슴이 차가운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신학교 3학년 마치고 유학 나올 때 여러 친구들이 눈물을 흘려주었지만 저는 눈시울을 적신 적이 없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슬픈 영화 볼 때는 많이 울면서도 정작 눈물이 나와야 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가슴으로 지나치게 머리만 쓰며 산다는 느낌을 항상 받습니다.
그러나 다시 감정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가슴이 뜨거운 것인지 착각할 수도 있는데 가슴으로 사는 것이 겉보기에는 감정적으로 사는 것과 비슷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도 이 구조를 따릅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감정은 호수의 표면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좋았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의 표면과는 다르게 영혼의 단계에 이른 이들은 육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성은 육체의 감정을 조정하여 평정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평화는 아닙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 단계가 바로 하느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단계입니다.
성인들이 이 단계에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도 다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예수님도 라자로의 죽음을 보면서 또 예루살렘을 보면서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또 어떤 때는 유다인들을 심하게 질책하시고, 어떤 때는 성전을 뒤집어엎으며 분노를 폭발하고 폭력까지도 쓰십니다. 
이 감정의 변화는 육체의 감정이 아니라 마음의 감정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룩한 분노이고 거룩한 질책이고 거룩한 눈물입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나오는 감정은 모두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심장은 썩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하트 모양으로 유리 상자 안에 넣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한 부분이 불에 그슬린 자국이 있습니다.
바로 천사의 불화살로 맞은 자리입니다. 
 
천사가 사랑의 불화살로 데레사 성녀를 찌른 이후에 그 심장은 항상 사랑에 불탔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을 가지면 원수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총망라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유다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고집으로 메시아를 믿지 않으려 했고 마태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길게 나열한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신의 고집쟁이 민족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마태오의 따듯한 가슴과 눈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정적인 사도들을 이성적으로 만들고 또 영적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심장을 갖는 날까지 (물론 그 이후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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