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회개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를 의지하는 삶에서 ‘나는 나’라고 하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나오게 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나를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는 극도의 자기 무력화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
낙타 털은 죽은 낙타가 썩어서 남겨놓은 것입니다.
길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죽 띠는 동물의 거친 육체를 절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와 들꿀은 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는 잡기도 어렵습니다.
날아오면 먹고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들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도 어렵지만, 벌들이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왜 위대한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장 액수’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통장 액수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거나 불안하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 곧 파라오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이 있건 없건 이집트 안에서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예는 고통스럽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라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서 통장 액수를 어느 정도선에서 제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 달 생활할 돈만 남겨놓고 다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제만큼 철밥통이 있을까요?
죽기까지 먹고 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액수를 유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돈을 모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통장 액수 줄이기를 실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점점 저 자신을 믿는 이집트로 회귀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작은 신앙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나의 힘을 뺄 때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곳입니다.
파라오에 의지하지 않을 때 만나와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도 샌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굶기지 않으십니다.
일론 머스크는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고는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기 위해 나를 믿는 마음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챙겨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 체험할 때 조금 더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사회복지를 하시는 한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두 봉사자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 수녀님은 노숙자들, 탈북자들, 독거노인들, 결손가정 아이들 등을 정신없이 도와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떨어져서 고기반찬도 올리지 못하고 멸치를 주시는데 작은 멸치도 못 사고 큰 멸치, 그것도 똥도 빼지 못해 쓴 멸치를 반찬으로 내어놓아야 하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어머, 걱정하면 안 되는데….”라며 주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하신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에 의지하려 광야에 머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겨울이 찾아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 달라고 얼마의 돈을 맡기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것을 왜 안 쓰냐고 할까 봐 ‘어디다 써야 할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두 봉사자분이 오서서 그런 말씀을 하니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이 깜짝 놀랄 액수를 드렸습니다. 물론 수녀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빼고 광야로 나온 이에게 주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이 아닐까요?
물론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부터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 더 맡길 줄 아는 사람부터 당신 모든 것을 쏟아주십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십일조’입니다.
통장 액수는 내 힘으로 사는 상징입니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려고 할 때 나는 광야에 살게 됩니다.
돈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선악과를 바쳤을 때의 에덴동산에 머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 챙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올바른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은 결코 내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선으로 당신 창고의 문을 그 사람을 위해 여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저는 내년부터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모든 신자분에게 각자의 교무금 통장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신앙 고백을 하는 만큼 광야로 나올 수 있고 그래야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피부병이 들어 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 죽어가는 강아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물보호소에 맡겼습니다.
강아지는 치료받았지만, 털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강아지를 입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누가 입양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자기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죽었을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를 발견한 이가 그 강아지를 입양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반려견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강아지는 자신이 아니면 또 외로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강아지입니다.
조금만 사랑이 있어도 양심상 그런 강아지를 그냥 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지만 ‘뼈만 남은 채 버려져 죽어가는 개에게 다가간 여성이 한 일’이란
‘개감동이야’ 유튜브 채널을 시청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피아는 ‘자비롭다’라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자의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합니다.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 보려는 사람은 제쳐놓으시고 가장 힘을 뺀 이를 먼저 찾으십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내년부터는 십일조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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