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공감, 치유의 시작
세바시 313회에서 ‘경청은 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란 제목으로 기업분쟁연구소 소장이자 변호사인 조우성씨가 강연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기업 간 분쟁이 있을 때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변호를 해 주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변호사 새내기 티를 막 벗었을 때 한 은행에서 의뢰가 왔습니다.
그런 큰 건수는 자신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인데 자신에게 의뢰가 와서 의아해 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은행을 고소한 사람이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어서 윗선에서는 누구도 그 사람이 고소한 건수는 맡지 않으려고 해서 자신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은행을 괴롭히려고 계속 트집을 잡아 고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을 할 때마다 은행 직원들을 증인으로 세우는데 몇 년 전 이야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위증죄로 고소하여 또 괴롭힌다고 합니다.
모든 재판은 은행이 이기지만 이 재판을 하면서 직원들과 증인으로 불려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받아야하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을 다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기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괴롭히기 위한 재판인데, 이번에는 증인으로 부 은행장을 신청한 것입니다.
이 의뢰를 부탁한 은행 쪽에서는 이것으로 부 은행장까지 법정에 서게 된다면 자신들은 회사에서 잘리게 된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첫 재판은 가볍게 끝나는 것이 보통인데 그 때 조우성 변호사는 은행을 고소한 사람에게 가서
정중히 먼저 인사를 하였습니다.
매우 험상 굳게 생긴 50대 중반의 남성이었는데, 그는 변호사를 본 채 만 채 하며, “이번에 변호사가 바뀌었군. 흠. 잘 해 봅시다.”라고 퉁명하게 말하더랍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잠깐 이야기를 하자며 그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왜 뻔히 질 것을 알면서 이런 재판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복도에서 한 30분간 입에 거품을 물면서 은행이 자신에게 했던 억울했던 일들을 토해내더랍니다.
그러던 중에 이 사람이 또 다른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는 시간이 되면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다른 소송을 이길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나가던 길에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며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조 변호사는 몇 시간을 투자해가며 이것저것 조언해 주고 서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정리해 주었습니다.
5억이 걸린 소송이었는데 나중에 조 변호사 덕으로 3억을 받아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다음 재판 때 부 은행장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조 변호사가 좀 섭섭하다고 말하자, 그 때서야 다른 사람에게는 다 그래도 조 변호사에게는
그러면 안 되겠다고 하며 증인을 모두 철회하였다고 합니다.
조 변호사는 지인을 통해 그분의 아들을 취직까지 시켜주었고 지금도 그분과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은행을 괴롭히던 그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털어놓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은행을 고소한 것이고 은행은 자신을 방어하기 바빠서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공감해주는 단 한 명만 있어도 모든 아픔을 깨끗이 내려놓을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필리핀 여자아이들 몇 명이 강아지를 밟아서 죽이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유포되면서
동물 학대에 대한 논란이 일었었습니다.
저도 잠깐 보았는데 처음에는 장난하는 것처럼 맨발로 강아지를 살짝 밟거나 툭치더니 나중에는 조금 세게, 그 다음에는 차례로 밟고 건너가며 작은 강아지의 모든 뼈와 내장을 다 망가뜨렸습니다.
그렇게 강아지를 죽이며 웃는 사춘기 여자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어떤 공포영화보다 마음에 잔상이 오래 남았습니다.
‘어쩌면 강아지가 아파하는 것을 저렇게 느끼지 못할까?’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합니다. 살인을 저질러도 죄책감도 없습니다.
상대가 아픈 것을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감능력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야 길러진다고 합니다.
내가 행복해야 상대의 마음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힘들면 남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남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감’이라는 말이 많이 떠오릅니다.
우선 백인대장은 자신의 하인이 아프다는 것에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아파합니다.
가족도 아니고 많은 하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지배하는 나라의 장교임에도 피 지배국인 한 갈릴레아 사람에게 기적을 청합니다.
이는 자신의 하인을 위해서 바보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마음을 공감하십니다.
그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기적을 청한다면 그 사람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직접 그 집으로 가려고 하십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발을 당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실망시키려 하지 않는 마음. 상대의 마음을 느끼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백인대장은 또 예수님께 피해를 끼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면 부정해진다는 이스라엘 풍습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시라고 청합니다.
어차피 오셔서 고쳐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멀리서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인대장도 예수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공감과 배려의 연속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백인대장의 공감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우성 변호사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 때문에 그 사람의 분노와 쓸데없는 재판을 통한 쌍방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처럼, 공감의 능력은 상상외로 이 세상의 분쟁을 줄이고 또 기적을 일으키게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서로를 느끼지 못하도록 흑과 백, 좌익과 우익 등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 듯하고, 또 그렇게 몰고 가는 느낌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트집잡어서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눈만 오면 나무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팬더가 있었습니다.
다 미친 팬더라고 했지만 그 팬더는 눈 올 때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자신의 발자국 때문에 굴에 있던 새끼를 사냥꾼들에게 빼앗긴 아픈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위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이 공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지 말고 공감하려 노력합시다.
한 마디 말이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백인대장과 예수님은 우리로 말하면 일본 장교와 조선 평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념이나 풍습을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판단이나 비판이 아닙니다.
바로 공감의 힘인 것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