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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1-27 조회수 : 579

 
어떤 삶이 깨어 준비하는 삶일까?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그리고 복음 내용은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깨어 준비하던 이들은 구원받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를 알지 못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교회라는 방주에 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8-39) 
 
깨어 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그러니까 ‘바쁨’입니다.
우선 너무 바빠서 죽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며 노아의 홍수 때처럼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신이 없어 깨어있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을 이 세상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도 용서를 청하러 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런 것이 놀라운 이유는 바로 ‘죽음’ 앞이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함이 놀라운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주님께서 오실 때를 아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몰라도
매일이 주님께서 오실 수 있음을 아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따라서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행히 할머니의 돌아가심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어렸을 시절을 지냈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오늘도 죽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잠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고 죽음을 무서워하면 잠도 무서워하게 됩니다. 
 
잠잘 때 기분 좋게 잘 수 있다면 깨어날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처럼 기분 좋은 잠을 자려면 하루가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하루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내일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천상의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이휘재 씨를 질투했습니다. 나의 희망이 이 세상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지금 희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성공한 삶이다!’라고 생각하니 버티는 삶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희망’인데,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게 만드는 것도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하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이 세상 것들이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갖지 못해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나뭇잎을 찾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더니 나뭇잎이 없는 것에 대해 더는 절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천상의 것을 희망하게 되었고 그때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바꾸지 않으면 불러도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제의 길로 저를 아주 오래전부터 부르고 계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가 모든 사람을 배로 초대해도 그들의 희망은 이 지상 것에 있었기 때문에 노아의 부르심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사라져버릴 이 세상, 가라앉는 배에 집착하지 맙시다.
우리 희망은 하느님 나라, 천국에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희망을 품으면 이제 가지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주셨으면 나도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주셨기에 하느님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내가 하느님이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많은 실패가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 것에 대한 희망을 접고 천상의 것을 희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내가 천상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하느님의 자녀만 삽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결국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병에 걸렸음에도 “오, 아름다워라!”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내가 사랑이 됩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태양이기 때문에 뜨거운데
우리가 그 태양 덕분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 때문에 위로 오르는 사랑의 몸통과 같습니다.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없으면 사랑은 커지지 않습니다.
내가 천상을 더 희망하고 하느님임을 더 믿어야 사랑이 더 커집니다.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마치 오징어잡이 배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더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이 향주삼덕에 기인합니다.
향주삼덕을 닦는 오징어와 같은 존재만이 결국 방주에 탈 수 있고 천상 시민이 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과 믿음과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분 품에서 자라난다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 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혼자 어린 자신을 키우던 그 모습을 아들이 더 늦기 전에 눈에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들은 다행히 어렸을 때 수술받아 한쪽 눈만 0.2의 시력을 가졌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해 준 희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아들은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이제 아버지의 눈이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 희망도 가질 수 없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을 수도 없으며 그래서 아버지나 친구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믿어주었고 희망했으며 사랑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쏟아지는 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깨어 준비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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