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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1-23 조회수 : 634

이 세상에서 희망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 반대 받는 표적인 우리를 이 세상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끝까지 참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참아나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은 참아내는 힘은 무엇일까요? 제가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니 대학에 다니며 저와 동년배들이  TV에서 잘나가는 것을 볼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도 돈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돈 500원이 없어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파는 점심을 굶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휘재 씨 같은 경우는 “그래, 결심했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말도 안 되게 웃기고 또 말도 안 되게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처지로서 어떤 벽을 느꼈습니다.
언젠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다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런 사람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짓눌렀습니다.
이러한 절망감이 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희망할수록 희망의 힘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56회에 일찍 성공을 거둔 후 실패를 맛보고 오랫동안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온 태사자 김형준 씨가 나왔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어느 정도 실패하기에 우리가 실패했을 때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형준 씨는 공부를 상당히 잘해서 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획사에서 큰 계약금을 준다고 하며 김형준 씨를 불렀습니다.
그에게 돈과 인기는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금을 부모님 돌려주지 않고 친구들과 돈을 쓰러 다녔습니다.
기획사에서 받을 계약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학기 학점 2가 안 되어 학사경고를 받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해지면 되니까.
하지만 계약 자체가 자신에게는 거의 돈이 떨어지지 않는 계약이었습니다.
인기는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매달 80만 원씩 받아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안 좋아진 것은 태사자까지 해체하게 된 것입니다. 
 
김형준 씨는 사람들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으며 나이가 46세가 될 때까지 자발적 외톨이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자기 모습을 알고 있던 이들로부터 전화 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 우울한 나머지 뭐라도 해야 하겠기에 택배 일한다고 합니다.  
 
일찍 성공했지만 오랜 시간 살아갈 힘을 잃었던 김형준 씨가 다시 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는 또 다른 희망이 생겼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쳐가던 대학 때 힘을 얻게 해 준 것은 종교였습니다.
저는 그때 잘나가던 저의 또래들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만약 내가 천국 가고 저들이 지옥 간다면?’이라는 몹쓸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은 저에게 다시 살 힘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희망할 때는 오히려 희망의 힘을 잃습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야 힘을 얻습니다.
땅에 묻히면 힘을 잃습니다.  
 
희망도 총량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를 희망하면 하나는 덜 희망하게 됩니다.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을 때 나비는 더는 나뭇잎을 희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꽃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나뭇잎이 없어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내가 희망하는 대상이 있는 곳에 나도 살게 됩니다.
천국을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천국에 가면 우리는 우리가 잃었다고 착각할 것까지 다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 뒤의 세상을 희망하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희망하며 희망을 잃고 사는 삶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기도 아주 쉬워집니다.  
 
지옥문 앞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이은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희망하면 희망을 잃습니다.
항상 나와 비교되고 내가 범접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희망은 절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을 희망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힘들어지고 행복 지수가 떨어집니다.
심지어 자살률이 1위입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라고 하는 이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힘들게 살도록 만드는 이들입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 희망이 이 지상의 것에 쓰인다면 힘을 잃습니다.
마치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어도 괜찮을까요? 다 망가집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빼내고 다시 경유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희망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상의 것을 희망하면 고장 납니다. 연료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바뀌어야 합니다.  
 
단편영화 ‘슬픈 남자’(The Sad Man)이 있습니다. 그는 늘 혼자입니다.
혼자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줍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남자의 가면을 벗기자 남자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아이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해합니다.
아니 그것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려면 좋아하는 것을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그 좋아하는 것에 맞게 나도 바뀝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계속 나뭇잎이 없다고 우울해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는 것에서 천국의 것을 희망하는 것으로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그 즉시 다시 삶의 에너지가 솟습니다. 
 
본래 희망은 하늘의 것이고 하늘의 것을 희망할 때 작동합니다.
꿀은 애벌레에게 어떤 에너지도 주지 못합니다.
먼저 나비가 되어야 꿀이 에너지가 되듯, 천국을 희망해야 희망이 나에게 에너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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