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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1-22 조회수 : 599

멸망의 표징과 부활의 표징의 차이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여러 표징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첫 번째는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세 번째는 큰 지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의 방식은 바로 우리 자신에서 시작하여 세상과 자연, 그리고 하늘로 시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방위적인 표징이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한 사람의 힘든 죽음을 생각해봅시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 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더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만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 품 안에’]  
 
이지은 씨의 남편은 죽음 앞에서 이전에 죽은 분의 죽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뻔하였습니다.
죽음이 다 그런 모습처럼 여겼고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일입니다.
꼭 그런 죽음을 따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멸망하는 이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곧 잘못된 믿음, 부정, 반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하늘의 징조까지 따릅니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결국 멸망하게 될 이 세상에 관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라 이 과정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죽음도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전쟁과 반란도 없으며 큰 지진이나 전염병도,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징조도 없습니다. 말기 암 환자를 18년 동안 보아오며 김범석 교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이야기입니다. 
 
일흔 살의 암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는 병원에 왔을 당시 이미 폐암 4기로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할머니도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비록 완치 목적이 아닌 생명 연장 수단의 항암치료일지라도 씩씩하게 잘 따라와 주셨습니다.
진료 때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옅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만 하셨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우리 애들이 걱정이지.
어린 손주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할머니는 그렇게 항암치료 받으면서 의연하게 일상을 이어 나갔습니다.
가끔 안부를 물을 때면 딸과 같은 동네로 이사 가서 손주들 볼 일이 더 많아졌다면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정밀검사를 해보니 할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종양은 이미 너무 커졌고 이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할 때 환자들과 가족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합니다. 
“분명 좋아진다 했잖아요.” “왜 나만 약효가 없는 거예요?” “치료 열심히 받았는데 왜 나빠져요?”
가장 처음 반응은 부정, 그리고 분노, 마지막은 원망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마음 안에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과 병이 창궐하고
헛것까지 보다가 결국엔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란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애썼는데 내가 미안해요.
오늘도 치료 잘 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는 죽음 선고를 한 의사를 오히려 위로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할머니는 오늘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그 어떤 표징도 없으셨습니다.
착잡한 의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그날도 씩씩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마지막은 일찍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도, 가족들도, 헤어짐이 가까워졌다는 걸 받아들이고 호스피스 상담받으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할머니의 딸은 김 교수에게 생각지도 못한 편지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이제 엄마와의 작별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아프기 전과 똑같이 우리를 돌보던 대단한 엄마가
자꾸 약해져 갑니다.
이제는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해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까요, 하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님이 엄마랑 꼭 붙어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저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아이들 등원도 함께 시키고, 사우나도 가고, 산에도 갔던 지난 1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야속하게도 이 편지를 받은 후 얼마 못 가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모습처럼 할머니의 마지막도 의연하고 씩씩했고,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김 교수는 말합니다. 
“나는 그동안 할머니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짐작하건대 가방끈이 길거나 넘치게 부유한 삶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이 평범하지만 어렵고 특별한 일을 해 낸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있다.” 
 
출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중 ‘18년 의사 생활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암 환자’, 유튜브 채널, ‘책썰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위 할머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멸망의 표징도 겪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냥 평소처럼 살고 잠처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표징을 겪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잠처럼 평화롭게 만들 믿음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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