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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0-20 조회수 : 594

소극적인 사랑도 있을까? 
 
 
어느 아담한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어난 이야깁니다.
그 가게엔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가게 사장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클래식을 사랑하는 아주 멋진 청년이죠. 
 
그리고 언제부턴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가게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옵니다. 물론 아가씨의 목적은 레코드가 아닌 청년이었죠. 
 
“안녕하세요? 찾으시는 판이라도…?”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옵니다.
“이 판 얼마예요?” “5달럽니다”
아무 말도 못 한 체 레코드판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레코드판만 사고 문을 나섭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가씨의 사랑은 깊어만 가서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 가족도 없이 혼자 살던 아가씨는 유일한 친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장례를 치르고 아가씨의 집을 정리하던 친구는 굳게 닫힌 작은 방문을 열게 됩니다.
이 방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엔 포장도 뜯지 않은 레코드판 수백 장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 왜? 레코드판을 뜯어보지도 않고 쌓아만 뒀을까요? 안타깝게도 아가씨에겐 전축이 없었습니다.
단지 청년을 보기 위해 레코드판을 사러 갔으니까요. 
 
‘얘는 듣지도 않는 레코드판을 왜 이렇게 사 모은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는 무심결에 포장을 뜯어봅니다. 그 속에 쪽지 하나가 떨어집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p.s. 제 이름은 존이라고 합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다른 판을 뜯어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8시 가게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오늘 안 나오시면 내일모레 언제까지고 기다릴 겁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판에 존이 쓴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친구는 존이라는 청년을 찾아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년은 이야기를 듣고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사랑한 것이 맞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가로놓여 남자는 3년 동안 반응이 없는 노력만 했고, 여자는 말도 못 하고 기대도 못 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수줍음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모습입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용당하고 버려지기 싫으면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을 받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소극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매우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에게 먼저 방문하셨습니다. 
 
사랑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적극적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은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은 붙이지 않으면 꺼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불이 붙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세상과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으려면 붙여야만 하기에 사랑이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다가가는 사랑만이 사랑일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불을 붙이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적극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들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먼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믿는 자신입니다. 
 
자신이 내향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건너기 무서워도 자꾸 건너다보면 안 무너진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외향적인 경험을 하다 보면 자신이 외향적인 사람으로 믿어가고 그러면 진짜 외향적인 사람이 됩니다. 
부탁하면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봐, 무시할까 봐 주저하는 사람, 거절당하는 상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고 하는 간단한 일조차 어려운 사람 등 우리 주변에는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책 『거절당하기 연습』의 저자 지아 장 또한 수줍음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꿈이었던 사업을 시작하면서 더는 거절 때문에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거절당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거절을 수치스럽고 개인적인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한 번 더 시도해봤다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거절에 내성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훈련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100일 거절 프로젝트.
100일 동안 황당한 부탁을 해서 일부러 거절당하고 무뎌져 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도전을 통해 저자는 세상은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 훨씬 친절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다 내향적으로 시작합니다.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모든 동물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려면 외향적인 성격이 요구됩니다.
내가 외향적인 성격이 되더라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향적인 성격,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외향적인 성격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하는데 소극적이면서 사람들이 다가와 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사랑의 본성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입니다.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듭니다.
내향적인 성격에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화됩니다. 
 
외향적으로 되고 싶을 때는 언제든 외향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자아가 성령의 불로 타버려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이웃에게 사랑의 불을 옮겨붙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나에게서 나가 상대를 방문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불은 태우지 않으면 스스로 꺼집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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