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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0-05 조회수 : 588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완벽하게 심판할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저희 교구 사진가 협회 지도 신부님이 사제의 수고에 대한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수단을 입고 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일주일간의 노력으로 드디어 검은 수단 여기저기에 흰 땀 마른 자국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땀을 말리기 위해 걸어놓은 수단을 본 주방 도우미 자매님께서 물수건으로 그것들을 닦아낸 것입니다. 
 
일주일간 일부러 땀을 내며 입고 다녔던 수단,
드디어 그 땀이 밴 수단을 찍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옷을 입고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자매님이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자매님은 참 좋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아무리 확신하는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확신이 항상 옳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를 만나 자신의 사도직을 인정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파견을 받았다고 해서
독자적인 노선만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인정 없는 복음 선포는 결국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교회가 어떤 소명이 있는지는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는 케파, 즉 베드로와 이러한 약속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입니다.
교회의 복음 선포가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베드로도 바오로도 모두 이방 땅인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방 민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고
나머지 사도들도 모두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만 이방 민족들에게 파견된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야고보와 케파(베드로)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여기고 있고 그 “주요 인사들”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들 위로 세우신 교회의 권위는 인정하고는 있지만 아직 교회가 온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 받았음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이라고 다 완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바오로 사도에게 야단맞을 행동을 한 것은 맞습니다. 
 
베드로 스스로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믿고 있었음에도
할례를 주장하는 신자들이 오자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은근슬쩍 자리를 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 사람을 두려워한 행위는 분명 교회의 수장으로서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렇더라도 바오로 사도가 교회의 수장을 사람들 앞에서 질타하고 또 그것을 어쩌면 자랑스럽게
편지에 쓰기까지 하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형제가 잘못을 하면 먼저 개인적으로 가서 말해주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다른 한 사람을 데려가서 말해주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바오로는 할례의 율법적인 행위보다는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믿게 하게 위해 자신의 권위를 세울 필요는 있었으나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조금 심한 면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얼마 안 되는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는 베드로가 그를 야단칠 수 있는 온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 받은 바오로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오로 위에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바오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주신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늘 독서에서는 그래도 바오로 사도의 조금은 완벽하지 못한 면도 엿볼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바오로의 칼과 같은 성격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는 물불을 안 가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모든 행동이 주님의 뜻에 맞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이런 정도의 실수는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께 사탄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그렇게 질타하면서도 교회 수장으로서의 존중은
끝까지 잃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자칫 부족함이 보이는 바오로 사도도 단지 그것 때문에 사람까지 판단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어떤 맘에 들지 않는 행위 한 두 개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온전한 평가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주님을 대신해 교회가 신중하게 대신 해 주기도 합니다. 
 
한두 가지의 행동으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바오로 사도도 모든 행동이 다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위대한 사도들도 그 정도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판단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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