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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10-02 조회수 : 519

전에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욕을 하는 아이들이 욕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욕을 하는 대가로 많은 돈을 주다가 점점 돈을 줄여가니까 아이들이 그 적은 돈을 받으며 욕을 하지는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보상을 붙이면 보상이 작아짐에 따라 그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삶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에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이 고통을 넘어설 보상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힘차게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한다면 무엇을 주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갓피플’이란 채널에 한창수 목사가 ‘고난을 절대 해석하지 마세요’란 제목으로 자기 삶에 비추어 고난 극복법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한창수 목사의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소년을 출산한 직후 치료 불가 상태의 암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랜 투병 끝에 모르핀 중독으로 인한 쇼크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는 명목으로 삼 남매를 두고 사라졌습니다.
형은 공부를 핑계로, 누나는 시집을 핑계로 도망갔습니다. 
 
소년이 사는 동네는 조폭들의 본거지인 대구 향촌동이었습니다.
버림받고 가난했던 소년이 가졌던 세상에 대한 분노는 그를 뒷골목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년이 조폭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이 당연한 절차처럼 여겨지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에 의해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오면 필통을 준다는 것에 혹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면 똑같이 아들이라며 창수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따듯한 밥을 얻어먹고 틈틈이 용돈도 받았습니다.  
 
소년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위험한 동네에서 온 소년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소년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권사님이 마태오 복음 6장을 읽어주었습니다. 6장 30절을 읽을 때였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부분이 갑작스레 소년의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버림받은 줄로만 알았던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돌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벅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에게 있던 어둠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물론 소년은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교실에서 자며 신문 배달, 붕어빵 장사, 방범대원 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이상하리만치 행복했습니다.
비참한 환경이나 처절한 생활은 결코 소년에게 있는 빛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뜨거워진 고등학생의 소년은 친구들과 길거리 찬양하며 뜨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소년의 친구들은 새벽에 일어나 소년의 신문 배달을 도와주었고, 친구들의 어머니는 소년의 도시락을 틈틈이 챙겨주시며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친구 중 한 명은 후에 소년의 아내가 되었고, 친구들 대부분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소년 역시 목사가 되어 뜨겁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고난은 내가 해석하고 보상을 준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하고 중독됩니다. 
먼저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안다면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알면 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목적은 바로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2007)에서 보면 윌 스미스는 지구상에 퍼진 치명적 바이러스로 좀비들 속에서 자신 혼자 남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줄 유일한 존재는 개 한 마리입니다.
이 개는 이미 죽은 가족과 함께 키우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입니다.
하지만 좀비들에게 개까지 죽게 되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다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는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싸웁니다.
결국 고통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내고 속하고자 하는 공동체가 주는 정체성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에 대해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믿음이란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듯이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한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종은 온종일 일하고 주인의 저녁상까지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라 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만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 이것이 우리가 믿음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저 사람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조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이 생겨 나쁜 생각을 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주시는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좋은 분일 수밖에 없음을 믿게 됩니다.  
 
미국 L.A. 올리픽 때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 다이빙이 전 세계에서 가장 기량이 높은 수준으로 장기 집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자들이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어떻게 그런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선수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선수가 처음에는 100미터 육상선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이 선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육상을 매우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자주 넘어졌고 자주 풀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네가 달리는 것만 봐도 좋다.
네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서 뛰는 것을 보면 엄마는 너무 기뻐. 1등 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아름다운 일이야.” 
 
늘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엄마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다이빙대에 설 때마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엄마가 떠오르고 그러면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속하기 위해 이 선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는 보상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공동체는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가 천국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의 수준만큼 고통을 극복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은 내가 속하려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주는 정체성에 관한 믿음. 이것이 내가 어디까지 고통을 이겨내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과연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이겨낼 믿음을 주고 있나요?
그러면 그 공동체는 이미 천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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