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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9-23 조회수 : 689

사람들은 왜 나를 만만하게 보는가?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성의 정체성의 ‘어머니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휘둘리고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인간은 분명 누구에겐가는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속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당신을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들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나를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강한 삶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로 산다는 말은 세상 것들이나 사람들에게 다 휘둘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피조물이건 버려진 깡통과 같습니다.
나 스스로는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적 의존성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생존하려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소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욱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불안함은
나를 의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남에게 휘둘릴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법은 내가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입니다.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으로 아드님을 소유하십니다. 성령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소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라지 말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뜻에 의해 움직일 때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느님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닌가는 내가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고집부리는 것과 줏대 있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그러면 흔들립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발로 차 봅니다.
하지만 줏대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누군가의 권위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이 가장 만만합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휘둘리게 태어납니다.
‘나’라는 존재는 실제로 어떤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휘둘린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화내지 마십시오.
그건 내가 누구의 권위 있는 대상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으려면 누구도 그럴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십시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창조자의 것이 되십시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창조자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 것이라 천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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