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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9-09 조회수 : 553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게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60년간 오직 자녀교육 잘 시키려 갖은 고생하신 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루카 6,40)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하려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이 하는 행태를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1-42) 
 
곧 눈먼 인도자들은 자신들 제자들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 눈의 티를 빼내려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비난, 지적질, 혹은 나무람,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자신을 고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자유가 있어서 통제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이를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떠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슈보다는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전경에게 매 맞고 돌아온 선후배들을 볼 때 화가 나고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보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래서 너는 뭐가 잘났는데?”로 나옵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양심 때문에 알게 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죄는 사라지고 서로 간의 비방만 남습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식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 자기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잘못을 드러내는 방식은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 
 
한 소매치기 청년이 어떤 병원 앞에서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가방에서 돈 냄새를 맡아 소매치기하여 달아납니다.
얼마 뒤 그 소매치기의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옵니다.
형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보려고 병원에 왔었던 것입니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말에 형은 돈 없으면 다 죽어야 하느냐고 분개합니다.
이 모양이니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로 자신의 결혼자금까지 찾아오던 애인이 소매치기만 당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소매치기당한 시간과 장소는 정확히 자신이 소매치기 한 시간과 장소와 일치했습니다.
소매치기 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 죄의 칼에 찔리심을 통해 우리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는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지적질하고 나무라면서
고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실까요?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 들보, 곧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하십니다.
베드로의 예를 봅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적받은 베드로는 변했을까요? 안 변합니다. 언제 변했을까요?
정말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찌르면서 변합니다.
어떤 죄도 그 죄 때문에 찔려 피를 흘린 누군가를 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이 되려면 제자들의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들보가 사라집니다.
그제야 그들의 티를 빼내 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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