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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7-28 조회수 : 1402

비유를 이해하면 천국: 비유의 완성은 밥이다. 
 
 
데일 카네기에게 한 여성이 ‘걱정 극복 사례’로 보내 『자기 관리론』에 나온 내용입니다.  
 
"대공황 때 남편이 버는 돈이라고는 한 주에 평균 18달러 정도였습니다. 
남편이 자주 아프다 보니, 그마저도 벌지 못할 때가 많았지요. 
가벼운 사고도 잦은 데다 볼거리, 성홍열은 물론 독감도 여러 번 앓았어요.
결국 우리는 직접 지은 집을 잃었습니다. 식료품점에 주어야 할 돈이 50달러나 밀려 있는데, 먹여야 하는 아이는 다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저는 이웃의 빨래와 다리미질을 해주면서 돈을 벌었고, 구세군에서 산 중고 의류를 수선해서 아이들에게 입혔습니다.
걱정이 많아 병이 날 정도였지요.  
 
하루는 외상값이 밀린 식료품점 주인이 연필을 훔쳤다며 일곱 살 난 제 아들을 야단쳤습니다.
아이는 억울하다고 울었습니다.
정직하고 예민한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놀라고 부끄러웠을까요? 저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이제껏 겪어왔던 비참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탁기를 끈 다음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가서는 종이와 헝겊으로 창문과 벽에 난 모든 틈을 꼭꼭 틀어막았습니다.
어린 딸은 “엄마, 뭐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막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침실의 가스난로를 켰습니다. 불은 붙이지 않았어요.
딸아이와 나란히 침대에 눕자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 이상해. 우리 좀 전에 일어났잖아!” 저는 “괜찮아. 우리 둘이 낮잠이나 자자꾸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난로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가스 냄새는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깜빡 잊고 부엌에 있는 라디오를 끄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찬송가를 듣다가 제가 얼마나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혼자서 문제와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느님께 맡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스난로를 끄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날은 온종일 울며 기도했습니다. 저를 도와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제게 주신 복, 곧 건강하고 멋지고 마음씨까지 착한 다섯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배은망덕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후로 지금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집을 잃은 뒤 우리는 한 달에 5달러를 내기로 하고 임대한 시골의 작은 학교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그런 집에서라도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붕이 있어서 뽀송뽀송하고 따듯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닥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하룻밤 사이에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우리는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골프장의 휴대품 관리소에서 일했고, 부업으로 양말을 팔았습니다.
아들 한 명은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열세 마리나 되는 소의 젖을 짰지요.
어느덧 아이들은 다 자라고 결혼해서 제게 자랑스러운 손주를 세 명이나 안겨주었어요.  
 
가스를 틀고 누웠던 끔찍했던 날들을 돌이켜볼 때마다 저는 늦지 않게 저를 ‘깨워주신’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답니다.
그때 일을 저질렀다면 저는 인생의 수많은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살아온 즐거운 인생을 영원히 잃어버렸겠지요. 
 
이제는 누군가에게 더 이상 살기 싫다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소리치고 싶어요.
“그러면 안 돼요!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우리가 아무리 암울한 날들을 보낸다 해도 그 시간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때가 지나면 미래가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선한 물고기인지 악한 물고기인지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전히 나에게 의지하면 나는 악인이고 주님께 맡기면 선한 물고기입니다.  
 
세상에 사탄교가 있다는 것 아십니까? 사탄교도 성경처럼 자신들의 사탄경이 있습니다.
사탄경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
신앙인의 첫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죽음 직전에도 내 삶의 주인이 여전히 나라면 나는 사탄교의 단원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 수 없는 인간이면서 어떻게 나의 창조자가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라고 합니다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귀가 찢어질 듯한 포성이 터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 비명을 지르는 전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참호 안에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신을 찾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신을 찾지 않는다면 나쁜 물고기가 분명합니다.  
 
나쁜 물고기에서 좋은 물고기가 되는데 단 20분이면 충분합니다.
결단만 내리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평생 이 20분의 회개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영원한 불지옥을 선택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아서 좋은 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분은 오랜 냉담으로 하느님의 비유를 계속 거부하고 계셨기에 가장 중요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의 완성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비유의 완성은 이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누군가가 주는 선물은 다 비유입니다.
그 선물 안에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으면 비유를 이해한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비유를 다 알아들었을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 라면 하나의 가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유의 완성은 밥입니다.
그리고 밥을 이해하면 그 밥을 주시는 분께 죽음까지도 맡길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위 이야기에서 다섯 살 된 딸은 엄마가 함께 죽음으로 가자고 할 때 미심쩍은 마음에서도 엄마와 함께 누웠습니다.
어떻게 엄마에게 목숨까지 맡길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엄마가 주는 비유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유는 바로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밑밥입니다.
우리는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고 그 밀떡을 하느님의 살과 피로 주시는 양식으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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