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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1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7-12 조회수 : 1477

치유가 안 돼도 기도해주면 위로는 남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믿지 않는 도시들을 꾸중하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하지만 요즘에 우리가 믿지 않는 신자들에게 이런 꾸중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기적을 일으킬 힘이 없다고 이미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유튜브에서 박혁이라고 하는 어떤 개신교 청년이 콜롬비아에 가서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불량 청소년 세 명에게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콜롬비아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에게 갑자기 예수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무엇을 가져도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기쁨은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특별한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청소년 세 명은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함께하자고 하니까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저희 죄들을 용서해 주소서!”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무언가에 눌린 듯 기도를 따라 합니다.  
 
처음에 저는 그의 믿음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다음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여기 아픈 사람 있니?”
‘치유의 기도와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기도를 받은 이들에게 또 묻습니다. 
“움직여봐!” 그는 말합니다. 
“새로워진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칩니다.
예전 같으면 “쇼하고 있네!”라고 했을 텐데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안수할 수 없자 각자가 아픈 곳에 손을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기도를 합니다.
비웃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따라서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말합니다. 
“움직여보세요. 당신의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본 것은 그가 하는 치유의 행동을 따라서 한 이들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지만, 그의 말만을 들은 이들은 그냥 지나쳐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설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아주 단순하고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믿는 이들은 그와 함께 예수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길거리에서 손을 올리고 하였습니다.  
 
이 어린 선교사가 쇼하는 것인지 착각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놀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당신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신자들을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겸손하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올 리가 없어!’ 
 
치유해 주겠다고 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오라고 강복해줍니다.
나 자신이 치유의 힘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는 치유의 능력을 주시고 나쁜 영들에 대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사제는 성령의 힘으로 죄를 사하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런 기적에 비하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은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믿으면서 치유의 능력을 주셨음은 믿지 못합니다.
개신교가 치유의 능력은 믿으면서 죄 용서의 권한은 주지 않으셨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몸이 좀 안 좋아 양호실에 누워있었습니다.
단순한 감기·몸살 정도였습니다.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개신교 학교를 나왔습니다.
양호실에 누워있는데 종교를 가르치던 선교사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저의 머리에 손을 대더니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조금 기도를 드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았니?” 
 
저는 속으로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았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분은 다시 안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나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물어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나중에는 이렇게 얼버무렸습니다. 
“아, 예…. 나은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선교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마에 짚었던 그 따듯한 손길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나한테 안수 달라고 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믿고 기도해주면 그 사람에게 적어도 사제를 통해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따듯한 위로는 남습니다.  
 
아프면서도 사제에게 치유를 청하지 않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톨릭에 와서 고해성사만 보면 죄가 용서받는데, 본인 스스로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 신자들과 같습니다.
서로 부족한 면을 보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완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들도 무조건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신자들도 아프면 무조건 사제에게 청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이제 우리는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이 됩니다.
겸손해지려고 받은 능력을 믿지 않고 포기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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