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2,1-11 2티모테오 4,6-8.17-18 마태오 16,13-19
하느님 나라에 속한 이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표징은?
2007년 서해에서 20년째 주꾸미를 잡아 온 어부 김용철 씨는 청자를 꽉 붙잡은 채 딸려온 주꾸미를 보고 바다 밑에 무언가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김 씨는 이를 태안군청에 신고했고 잠수부들이 고려청자를 잔뜩 실은 채 가라앉아 있던 배를 찾게 된 것입니다.
주꾸미는 소라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조개껍데기와 같은 것으로 막는데, 이들은 밑에 잔뜩 깔려있던 청자 조각들로 막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조각들을 달고 다닙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환경의 것들을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꾸미는 우리이고 소라 껍데기는 그가 따르는 ‘법’이며 그것을 덮는 조개나 고려청자는 자신이 속한 세상의 ‘표징’입니다.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합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소라 껍데기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각자가 따르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 법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태어날 때부터 따르는 법은 ‘생존 본능’입니다.
생존 본능만을 따르면 마치 ‘격리 원숭이’처럼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표징’을 보입니다.
아기에게는 모든 대상이 자기를 살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또한 모든 대상도 자기와 같을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마치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람처럼 긴장되어 있고 모기에 물려도 죽을 것처럼 소란을 피웁니다.
이들은 ‘자기 생존’만을 추구합니다.
두 번째로 ‘세상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탐욕과 쾌락과 지배욕의 법을 따릅니다.
그러면 세상에 속한 표징이 나옵니다.
이들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관계를 맺어도 ‘이기적인 관계’라는 표징을 보입니다.
자기 영광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추구한다는 표징이 있는 것입니다.
황우석 사태처럼 일본에서는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이 있습니다.
그는 점점 오래된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신의 손’이라 불리며 일본 대 스타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유물들은 그가 산책하며 심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발견된 160여 개 유적 모두 날조된 것이라 자백했습니다.
세상의 법을 따르는 이들은 이런 표징을 낳습니다.
나와 세상에 법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하늘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법을 따르는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표징을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처럼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말기 암 선고받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이것을 알리지 않고 수단 어린이 후원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의 생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하느님 나라를 상상합니다.
오늘 베드로나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죽어도 좋다’는 표징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직 하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영광을 버리는 이들입니다.
영화 ‘빅토리아와 압둘’(2017)은 최고 권력자로 60여 년을 왕좌에서 군림한 빅토리아 여왕과
한 인도 청년의 우정을 다루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이끄는 빅토리아 여왕은 왕관이 주는 중압감에 늘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압둘은 여왕에게 기념주화를 전달하기 위해 인도에서 파견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화를 주면서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여왕은 자기를 미워해야 할 식민지 청년이 자신 발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며 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를 비서로 채용합니다.
압둘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 여왕은 압둘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털어놓습니다.
“멍청한 놈들! 고상한 바보 귀족들. 알랑거리며 주변을 맴돌고, 자리를 차지하려 기를 쓰지.
영국 여왕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아무도 모를 거야. 전 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 증오하고 자만과 질투로 가득한 아홉 명의 자식이 있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압둘?”
압둘은 말합니다.
“‘코란’에서 말하길, ‘우리는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
빅토리아 여왕은 이 코란의 말에 힘을 얻습니다. 새로운 소라 껍데기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압둘의 매력이 한몫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의 위협에서도 끝까지 여왕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여왕은 압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살아갈 날이 끝나가니, 숨 쉴 때마다 삶을 잡고 싶은 욕심이 생겨.”
“더 평안하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될 거예요.”
“영원의…. 연회장?”
그렇습니다.
압둘은 그리스도를 믿는 여왕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여왕이 죽자 신하들은 여왕과 관련된 압둘의 모든 자료를 불태웠고 그와 그의 가족을 인도로 쫓아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100년 뒤 1910년 압둘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느님을 찾는 이가 줄어드는 이유는 하늘의 표징을 보여주는 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표징은 하늘의 법을 따를 때 저절로 딸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 표징이란 이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삶입니다.
이웃을 위해 언제든 죽는 것이 우리 행복이 되게 합시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내가 속할 곳의 법을 따르고 그 표징으로 이웃에게 영원한 생명의 믿음을 주는 삶을 사는 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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