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5,3-7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으면 성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방치합니다.
도대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맹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 방치하는 것이 왜 사랑일까요?
우리는 가끔 버릇없는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되레 화를 냅니다.
그것이 사랑일까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자신을 무는 개까지도 감싸는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개가 다른 사람을 물게 될 것을 용인하는 범법자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정말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리면서까지도 잘해주는 주인일까요, 아니면 강 훈련사일까요?
강 훈련사는 개를 물속으로 끌고 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일단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개에게 입마개도 하고 조금씩 개를 주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로 끌로 나온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구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 혹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강 훈련사가 물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척박한 곳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고 본인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방치하신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깨에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죽이고 순종할 수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성심입니다.
사랑의 목적입니다. 사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나라 카리사마 대표 배우인 최민식 씨를 길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다 와서 최민수 씨와 혼인한 강주은 씨입니다.
강주은 씨는 빚이 지금 시세로 30~40억 있는 최민수 씨와 결혼하여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했던 최민수 씨에게 최대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참았습니다.
한국말도 잘하지 못할 때라 만화를 그려가면서 소통해야 했습니다.
사고를 칠 때도 참아내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주은 씨는 지금 연매출 600억 상당의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재정적으로 안정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반면 최민수 씨는 월 40만 원의 용돈을 타서 씁니다.
기름값 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주은 씨는 최민수 씨가 돈 개념이 없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광야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최민수 씨는 강주은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없애려면 환경의 결핍을 주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자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기를 살려주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궁핍과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자기가 사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못된 아이를 감싸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앙심을 품더라도 순종을 가르치는 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어깨에서 꼼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기 전에 주님께 의지합시다.
그냥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아멘!”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결핍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종만이 살길입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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