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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6-23 조회수 : 1577

루카 1,57-66.80 
 
사람은 이름을 이어준 분의 이름을 들어 높일 때 성장한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느님은 즈카르야가 이름을 지어주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당신이 주신 이름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세례자 요한을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쓰시기 위한 계획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름을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놀림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 이름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과 같게 여기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일시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고통은 자녀가 죽었을 때의 고통에 비견될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반려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어주고 불러주던 이름이 없는 동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그 동물을 나처럼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처럼 대해주시는 부모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수준처럼 성장하여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나 김연아 선수를 봅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이름을 준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름을 준 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피땀 흘렸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모만큼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이는 부모처럼 성장할 수 없고 그래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세례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 인입니다.
세례명을 가진 우리도 이에 감사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도록” 살아갑니다.
내가 주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사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합당하게 성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왜 인간처럼 될 수 없을까요?
어느 정도는 그 이름에 맞게 성장하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이름을 지어준 대상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하지 않으려고 다른 모음을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정도로 발음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러면 뭐 하러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을까요? 우리가 합당하게 부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의 이름을 불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이 여럿 있습니다.
처음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부모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할 때는 다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를 위해 당신들 이름 없이 그저 엄마와 아빠로 살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자녀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엄마로 살아온 김경희님의 인생은 힘들지 않았나요?”
대부분 부모님은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로 살 수 있게 해 준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부모들은 한결 같이 대답합니다. 
“내 인생의 전부!” 
 
이름을 준다는 말은 내 전부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나도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고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보니 어떠셨나요?”
자녀들은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그냥 엄마는 엄마인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거 같아요.” 
 
이제 나도 성장했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어야겠습니다.
그분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 이름을 잃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등하게 여겨주신다면 나도 그분 뜻에 따라 성장했음을 그분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아, 이 아이가 이만큼 컸구나!’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찬양!’이 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저도 신자들이 “삼용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기분이 나빠서 “앞으로 당신을 신부님이라 부르지 않겠소.
당신을 전삼용 씨라고 부르겠소” 라고 하면 그것은 사제로서의 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처럼 성장한 것은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분께 찬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야훼라고 불러봅시다.
그분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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