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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6-21 조회수 : 1819

마태오 7,6.12-14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해주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 해주려다가 호구가 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테이커-매처’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기버는 내어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빼앗는 사람이며 매처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을 보았더니 가장 높은 위치에 기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위치에도 기버가 있었습니다.  
 
왜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호구가 되는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에게 폭력까지 당하는 이지현 씨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의 호구가 됩니다. 이것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개는 훌륭하다 10편에 토르라는 강아지에게 온 가족이 당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개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토르라는 강아지는 아무 때는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 물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애꿎은 것을 물기는 하지만 화를 잘 냅니다.
가족은 평화를 위해 토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씨 좋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가족에게도 토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토르는 가족들이 잘해주는 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아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이 오히려 토르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토르가 가족을 ‘몰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대고 무언가를 주어도 왜 미리 잘하지 않았느냐고 엄포를 놓습니다.
생존본능 중의 하나인 교만을 가족들이 키워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호구가 되기 딱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들이 그 좋은 것을 받고 오히려 나를 밟고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면서 호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면서도 호구가 되기 있는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 감정을 살피면 됩니다.  
 
토르가 아버지만을 특별히 공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두려움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생존 욕구가 높은 개들은 두려움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이용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가 두려워서 잘해준다면 그 잘해주는 것은 다 상대를 더 교만하게 만들고 나는 호구가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몰이하며 최강자임을 자처하려는 토르를 강 훈련사는 되려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개에게 물려 피까지 흘립니다.
하지만 순종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시는 개에게 지나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은 절대 나를 두렵게 만드는 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질까요? 내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내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토르에게 저렇게 대하는 가족들도 분명 토르의 귀여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화내지 않을 때 가끔 부려주는 애교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을 아는 개는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두렵게 만들고 지배하려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베풀 때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해주면서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유튜브에 보면 ‘EBS 부모’에서 방영되었던 ‘불안한 엄마, 무법자가 된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5살 소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는 생떼 부리면 다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다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절제 없이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기가 죽어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기죽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단만 맞다 보니까 자기는 자녀를 키울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안해서, 그래서 두려워서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도 망치고 상대도 망칩니다.
두려워서 무언가를 줄 때는 호구가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지배당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셨기에 당연히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미안함도 두려움입니다.  
 
그냥 지금 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양은 그 좁은 문 뒤에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양 떼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차피 자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망가져도 주님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졌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랑, 그 좁은 문 뒤에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의 주인이 계십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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