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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3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31 조회수 : 1800

스바니야 3,14-18    루카.1,39-56 
 
복은 알아보면 오고 알아보는 이에게 간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신이 가야 할 곳을 택하실 때 성모님은 당신을 바로 알아볼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당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지구상에 엘리사벳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바로 엘리사벳에게 달려가셨습니다.
심지어 의인 요셉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알아볼 눈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요셉 성인보다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이 법칙을 “볼 줄 알면 온다”라는 법칙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 하느님은 아드님은 성모님 태중에 주셨을까요?
볼 줄 아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지만 실제로 그 안의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명예, 돈에까지 해당하는 법칙이라 믿습니다.  
 
어쩌면 성모님의 사람을 가려서 만나는 것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이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보물로 만들어주신 분을 위함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간다는 말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성체’를 두고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품은 우리 각자도 거룩한 성체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우리 안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2006년 필리핀에서 한 어부가 낚시하다 왠지 묵직한 대왕조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어보니 씹다 만 껌 같은 허여멀겋게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부는 거참 희한한 게 다 있다며 그것을 침대 밑에 넣어두고 10년 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것의 가치를 알게 된 어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진주로 최소 ‘1,000억’원을 호가하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조개가 그만한 진주를 만들려면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어부는 1,000억 원을 침대 밑에 두고 1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부라면 진주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값이 많이 나가는 진주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선물하는 것은 진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것을 선물하지 않으십니다.  
 
사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열혈사제’에 나오는 정도일 것입니다.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신앙을 갖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있어도 이상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사제는 그냥 한 종교의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에게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생명의 빵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존재입니다. 
사제는 한정된 시간에 신자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야 할까요?
당연히 사제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제를 사제로 세워준 것에 대한 예의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방문함으로써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을 알아볼 이들에게 우선 다가가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야 하는 수준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자신 안의 하느님을 믿게 할 성덕에 오른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이슬람 왕인 술탄을 찾아가 선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탄은 십자군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행동은 무모한 행동이었을까요?
술탄은 성 프란치스코에게만 이슬람 땅에서 선교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들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 그곳에 자기 형제들을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선교하기 위해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가게 됩니다.
이 당시 십자군은 다미에타의 나일강이 범람하며 홍수가 나고 역병이 돌면서 그리고 양쪽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서른일곱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교황 대리 펠라조의 특사로 서른아홉의 이슬람 술탄 알 카밀을 만나 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탄과 그 백성들이 개종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의 제사장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로 벌어지는 일이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의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슬람의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을 하며 불을 등진 채 도망을 쳐버렸고 술탄 알 가밀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 알 카밀을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보물을 주려 하였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 서약을 한 프란치스코는 먼지인 양 재물을 무시하였고, 그것을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프란치스칸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에게 프란치스코를 보내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프란치스코를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능력을 알았기에 사마리아로 들어가면 당신의 파견이 허사가 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누구라도 주님을 믿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나마 자신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파견하신 것이고, 아드님은 교회를 파견하셨고, 교회는 바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질 때 분명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우선 ‘성호경’으로 시험해 봅시다.
저희 동기 신부 아버님, 곧 가스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룻밤 사이에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로 항상 성호경을 긋고 다니십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성호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도 회개시키셨다고 합니다.
그중에 목사님도 네 분이나 있다고 합니다. 
 
성호경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호경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다가갑시다.
이것은 가려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를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주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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