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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29 조회수 : 1859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루카 24,46-53 
 
주님 승천, 떠나시는 것이 사랑인가?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실 때 내가 가장 크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여야 일치할 수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엄마가 지켜볼 때 공부하는 것과 지켜보지 않아도 공부하는 거 중에 어느 것을 더 원하십니까?
지켜보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아이가 성숙한 아이입니다. 
부모들도 처음엔 지켜보다가 이젠 자녀를 믿고 볼일을 봅니다.
이때 자녀가 부모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 자기 자신과 싸울 때 가장 큰 발전을 이룹니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에서 저자 앤절린 밀러는 완벽한 아내,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심리 상담 학위가 있던 준비된 엄마였습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술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남편과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를 닮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고쳐보겠다고 완벽한 아내가 되려던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술은 안 마시지만 심한 불안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밀러는 그런 남편에게 엄마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도 우울증과 분열증과 같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엄마는 이 모든 문제가 가장 완벽하다고 여겼던 자신 때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상담사가 어느 날 밀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자녀 행복의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이번엔 딸에게 묻습니다.  “네 행복에 대한 의무가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엄마는 왜 자녀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을까요? 자신이 불행한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입니다.
부모 탓을 하고 있기에 자녀들에겐 그런 부모가 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자신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코디네이터’였습니다.
완벽히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가족들을 도구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행복의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데서 해결됩니다.
어느 날 하루는 정원에 큰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나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남편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싸우는 가정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화를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자신의 탓으로 여기면 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막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때 아내의 말에 깜짝 놀라 자기 행동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책의 첫머리에 이 말은 그녀의 후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억제하지 못할 때면 나는 네 신발을 집어주고, 네 배낭을 져 나르고, 네 교통 법규 위반 벌금을 납부하고, 네 상사에게 거짓말로 핑계 대고, 네 숙제를 해 주고, 네 앞길에서 돌멩이를 치워주고,
‘내가 직접 했어!’라고 말하는 기쁨을 네게서 뺏겠지.” 
 
그녀는 자신이 이런 엄마인 줄 알고 나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아주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떠맡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 말이다.”
각자의 행복은 각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이의 행복까지 책임지려 하는 것은 나의 행복도 다른 이가 책임져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를 방치해야 할까요? 방치란 사랑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귀찮을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야 합니다.
맡기려면 힘을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오는 일을 맡기셨을 때 지팡이를 주신 것처럼, 주시고 맡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를 하루 동안 길에 버려놓고 몰래 아이를 지켜봅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아이에게 언젠가는 이렇게 부모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예수님도 그냥 하늘로 오르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성령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들도 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밤새 정글 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라집니다.
아이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겁을 먹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필요할 때 활을 쏠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이 활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두려움 없이 믿고 살며 성장하도록 하늘에서 우리 주위에 활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쏘셔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분이 보이시지 않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처럼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는 어미 새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분의 믿음을 실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려주실 성령을 기다리며 그 순간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떨어지는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는 날갯짓만 하면 됩니다.
물론 계속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을 주지 않고 떨어뜨리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떨어져야만 그 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미 새가 새끼 새를 떨어뜨린다는 말은 새끼 새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른이 되게 하려면 일단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해주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제 어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처럼 하기 위해 끊임없는 날갯짓을 하면 힘이 붙어 날게 될 것입니다.
이 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날갯짓하는 노력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대하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하느님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날갯짓은 언젠가 성령을 불러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시킬 것입니다.
저에게 이 날갯짓이란 이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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