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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27 조회수 : 2015

요한 16,20-23ㄱ 
 
기쁨의 씨앗: 희망하는 고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다시 보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관상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 수준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이 느끼는 근심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평화를 빼앗겼을 때 가지는 근심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잃는 고통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이 보이지 않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다시 부모를 잃은 고통과 같은 어둠을 견뎌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만나 자신이 인간이고 부모처럼 성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불안의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이 근원적인 불안을 잘 표현한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데이빗’은 사람이 아닌 로봇입니다.
‘하비’ 박사는 죽은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은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한 가정에 입양시킵니다. 
 
그 가정의 아이는 몸이 아파서 의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냉동상태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엄마 ‘모니카’는 로봇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동화를 읽어줍니다.
데이빗은 그 동화를 듣고는 자신도 ‘푸른 요정’을 만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냉동상태로 있던 모니카의 아들 ‘마틴’이 치료되어 돌아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데이빗이 마틴처럼 자기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데이빗을 산에 버립니다.
회사로 돌려주었다가는 데이빗이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왜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푸른 요정을 만나 꼭 인간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모니카는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진짜 아들인 마틴을 위해 데이빗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빗은 인간 사회를 방황하지만,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합니다.
로봇은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공지능 로봇을 파괴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 불안한 세상에서 간신히 ‘조’라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의 도움으로 자신을 만든 아버지 하비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하비 박사는 데이빗을 친절히 맞아줍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하비 박사가 자신과 똑같은 로봇을 이미 수십 개, 수백 개 만들고 있음을 봅니다.
아버지 하비 박사를 통해서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하여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푸른 요정을 만납니다.
비록 동상이기는 했지만, 그 요정에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2천 년이 지납니다.
지구는 멸망하여 더는 인간이 살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은 데이빗의 기억을 보고 그가 인간이 되고 싶어 2천 년 동안 푸른 요정 앞에서 청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외계인들은 그도 인간이라는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엄마 모니카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기억을 넣어줍니다.
데이빗은 이제 엄마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엄마 품에 잠이 듭니다.  
 
데이빗은 로봇이면서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희망은 먼저 인간이 희망해주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데이빗은 희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에 의해 정말 인간이 되는 꿈을 꿉니다.
데이빗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은 원한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큰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지닌 이가 먼저 믿어주고 희망해주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들이 그렇게 하였고 그들만큼 자랐고 개들만큼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는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주시고 죽음을 이기시게 해 주시어 우리도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예수님은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당신이 인간이 되셨고 부활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자기의 짧은 오른팔을 뻗어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만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랑 똑같구나!” 
 
키릴의 근심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자신도 남들처럼 성장하여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손자로 받아 준 할아버지도 자신처럼 한쪽 팔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릴에게 한 집안으로 입양되는 것은 죽음과 같은 모험입니다.
한쪽 팔이 없는 자기를 새 부모가 사랑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자신을 그들과 같은 모습임을 보여줄 때는 기쁨에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우리의 모습을 한 부모님은 하느님께 안기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근심과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다 보면 키릴처럼 기쁨을 맛볼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믿음과 의지입니다.
키릴은 이제 절망에서 벗어나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세상에서 온전히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수준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사실 희망은 고통스럽습니다.
도파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항상 더 큰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께서 이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시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희망하게 합니다. 믿게 합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죽음도 두렵지 않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기쁨은 바로 이 성령을 받는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며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수준의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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